사도행전(61강) 사도 바울 및 기독교 선교의 정당성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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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61강) 사도 바울 및 기독교 선교의 정당성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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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3.1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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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 폭동의 결과

데메드리오는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의 동료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극장으로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행 19: 23~41). 극장 안의 무리는 큰 혼란 가운데서 아데미 신을 소리쳐 찬양하였다. 바울은 그에게 친절했던 아시아 관원들의 조언을 따라서 극장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장려하기 위해 선출된, 부귀와 영향력을 갖춘 사람들로 의회의 회원들을 가리키는데, 그 지역의 종교적, 사회적 질서를 책임 맡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의 메시지는 모든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파급되었고, 그 결과 바울은 이처럼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과 교분(交分)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해서 알렉산더가 무리 앞에서 변명하려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들과 다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혹은 헬라인들에게 대한 모욕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내세운 인물이었다. 아울러 이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은장색들의 경제적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데미 신을 숭배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알렉산더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했을까? 아니면 유대인들의 우상배척을 변호하려 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알 수가 없지만, 무리는 적어도 이 유대인을 그리스도인들의 우상 배척과 동일시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슬로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치면서 그에게 발언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쫓아내버렸다. 데메드리오의 연설로 시작된 폭동은 마침내 시(市) 서기장의 연설로 끝나게 되었다. 서기장은 시민들의 모임(민회)의 결정을 공포했던 시의 서기를 말한다.

여기서 민회(民會)는 한 달에 세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민들의 모임이었는데,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ekklesia)로서, 이는 기독교에서 이 단어를 교회란 명칭으로 사용하기 전부터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32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기장은 에베소와 로마 정부 사이에서 활동하는, 가장 중요한 지방 공무원이었고, 또 민회의 수석 행정관이기도 하였다.

적절한 수사학적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시 서기장은 먼저 아데미의 동상이 하늘로부터 떨어졌음에 대하여 말하고, 또한 그 신전의 관리를 에베소인들이 담당했음을 말함으로써 무리의 견해를 인정했다. 가말리엘과 같은 스타일로, 그 서기장은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결백을 인정하면서 에베소 시민들에게 있어 진정한 위험은 바울이 아니라, 오히려 폭동에 대한 책임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시는 로마 제국의 지배 있으며, 시 지도자들의 주요 책임은 단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시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로마는 임명한 시 관리들을 해고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 전체는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계엄령 아래 들어가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서 언급된 가이오는 로마서 16장 23절과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 언급된 사람과 동일인일 것이다. 그는 다시 사도행전 20장 4절에 언급된다. 거기서 그는 더베, 즉 갈라디아 출신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게도냐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20장 4절의 더베는 서방본문(Western text)에 있는 대로, 마게도냐의 한 마을인 도버루스(Doberus)일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이전의 공개고발 사건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행 16, 17, 18장). 빌립보에서의 첫 번째 사건에서처럼, 여기서도 고발자들은 이방인들로서(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는 고발자가 유대인들이었다.), 기독교 운동에 대한 반대를 유대적인 것으로 보는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또한 예루살렘에서의 폭동과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행 21:27~36). 특별히 두 사건에서 폭동 동기가 매우 유사했다. 한 마디로, 기성종교의 신도들은 바울의 선교가 그들의 종교와 신전(성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항해서 반대했던 것이다. 서기장의 연설이 있은 후 폭동은 잠잠해졌고, 무리가 흩어지면서 질서는 회복되었다.

결국 에베소 폭동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데미 여신 숭배와 아시아에서 가장 맹목적인 우상 숭배적 종교를 공격할 때, 로마의 법이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했음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러한 점은 데오빌로를 포함하여 로마 정부와 로마의 시민들에게 기독교가 결코 로마 정부를 위태롭게 하는 불법 종교집단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선교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과 로마로의 마지막 여행은 준비하게 된다.          김경진 교수<백석대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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