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56강) 복음전도의 정당성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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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56강) 복음전도의 정당성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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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2.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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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총독 갈리오 앞에서의 재판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렀다(행 18.11). 이 기간 동안 바울은 또한 아가야의 다른 지방에도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고후 1.1). 또한 이 일 년 반 동안 바울은 사악한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두 편의 서신을 썼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발로 인해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주관하는 재판에 회부되었다(행 18.12). 이 때 바울은 로마 법의 승인을 받지 못한 종교를 장려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교처럼 로마 법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종교를 선포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혐의는 반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가이사 외에 다른 왕에게 순복할 것을 권면하지 않았고(행 17.7 참고), 또한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그 어떤 발언도 한 적이 없었다. 대신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일 바울에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오히려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이 그의 선조들의 믿음이며(행 24.14-15; 26.6-7 참고), 따라서 로마 법에 의해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갈리오는 사건의 핵심이 불법이나 부정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언어와 명칭과 법”에 관한 것으로 파악하고는 그들 스스로 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유대교는 로마 법 아래서 승인된 종교였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였기 때문에, 로마 법정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제기된 소송을 처리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새로운 종교라고 주장하였다면, 기독교는 로마 정부에 의해 불법 종교로 간주되어 금지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기독교의 복음전도는 로마 제국 내에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소송이 일방적으로 기각 당하자,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법정에서 폭행을 가하였다(행 18.17). 본래 그리스보가 회당장이었으나, 그와 그의 온 가족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까닭에(행 18.8), 소스데네는 그를 대신하여 회당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을 발산하기 위해 헬라인들이 소스데네를 폭행하였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회당 지도자를 폭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그들은 소송 사건에서 지고, 상황이 전보다 더욱 악화되자, 이를 빌미로 소스데네에게 폭행을 가했던 것이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겐그레아를 거쳐 에베소에 당도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19장 41절까지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중심으로 하여 한 단원을 구성한다. 이 단원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① 바울의 에베소, 예루살렘, 안디옥 방문(18.18-23) ② 요한의 세례와 에베소의 제자들(18.24-19.7) ③ 바울과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19.8-20) ④ 바울의 결심(19.21-22) ⑤ 에베소 폭동(19.23-24). 앞서 소개한대로, 이 단원은 바울이 에베소, 예루살렘, 안디옥 등지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시작했던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참고, 행 15.35-41). 여기서 바울은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깍는데(나실인의 서약, 민 6.1-22), 이는 그에 대한 잘못된 고발에도 불구하고(21.21),그가 여전히 유대법규를 준수하는 유대인임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다양한 서원은 매우 심각한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주 취하여졌다. 그리고 머리를 깍는 것은 서원의 마지막을 표(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참고, 민 6.18).

이후 바울은 또한 에베소를 잠깐 들려 거기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떠나 자신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그곳 유대인들과 변론을 벌이게 되었다(행 18.19). 이 때 바울은 에베소에 더 머물기를 원하는 현지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는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아마도 에베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기키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amsey). 여기 본문의 “교회”가 가이사랴인지 예루살렘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올라가”란 표현을 놓고 볼 때 해발 약 2,500 피트에 위치한 예루살렘 교회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 교회에 인사를 한 것은 이방인 선교와 예루살렘 교회와의 유대관계가 불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의 역순으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방문하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였는데, 이로써 2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이후 53-57년 사이에 수행되었던 3차 선교여행이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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