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53강) 복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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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53강) 복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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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1.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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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


아덴에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말하였다(행 17.22). 여기서 말하는 ‘종교성’(deisida imon)이란 단어는 ‘두려워하다’(deisis)와 ‘신(神, daimon)’이란 말의 결합어로써, 종교적이다, 혹은 경건하다고 번역될 수 있지만, 다분히 미신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실 이 단어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거기에 포함하느냐, 포함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축하 혹은 비판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다. 아덴 사람들은 바울이 계속하여 말할 때까지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지를 몰랐다. 문맥상으로 볼 때, 바울은 발언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 칭찬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한 준비를 잘 갖추고 있었다. 그는 교육의 중심지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또 그러한 훈련을 받기도 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에게서 사사를 받은 랍비였고, 따라서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을 성경을 통해서 사고하고 추론하는데 보냈을 것이다. 확신을 갖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도 바울처럼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되는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설교는 더욱 설득력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준비될 때까지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지식을 갖고 사역하되, 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불신자들의 질문과 논쟁에 보다 효과적으로 답변하기 위하여, 항상 좀 더 많이 알고 있어야만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설교의 서두에서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the unknown god)을 위한 제단을 세운 것을 언급하였다(행 17.23). 헬라인들은 어떤 신이든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그 신을 격노케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라벨을 붙임으로써 그러한 실수를 막고자 하였다. 다른 고대의 헬라 작가들 또한 이러한 신전들을 아덴에서 볼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전도의 접촉점이 되었다.

이것을 언급한 것은 그 신을 시인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참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접촉점으로 이용했던 것뿐이다. 비록 아덴 사람들이 교양 있고 대체로 종교적이었지만,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속하여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인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이방종교와 기독교에 공통적인 언어와 개념을 활용하여 아덴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그 다음에는 구약 곳곳에 흐르는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시 115.4-8; 사 40.18-20) 그 차이를 강조하였다. 그리고는 무지(無知)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마치고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러한 무지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지금이 바로 회개의 시기임을 지적하였다(행 17.30). 하나님이 모든 족속을 한 조상에서 시작하여 온 세상에 거(居)하도록 했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참고, 롬 5장). 이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바울이 하나님이 죽은 자로부터 그를 살리셨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불완전하게 끝내지 않았다. 그는 아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과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갖는 의미(축복이든 형벌이든)를 깨닫도록 촉구하였다.

헬라인들은 심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하나의 신 대신에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을 선호했고, 부활 개념은 불가해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에 괘념하지 않고 진리를 감추지 않았다. 이처럼 바울은 종종 그의 청중에 합당하게 접근 방법을 달리했다. 그러나 결코 복음의 근본적 메시지를 달리하지는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바울의 아덴 설교가 실패작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헬라인들에게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청중 가운데 일부는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고자 청했고(행 17.32), 그 중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를 비롯하여 얼마간의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나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은 아덴에서 실패하지 않았다. 단지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지 못한 자들이 실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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