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46강) 반대파조차 포용하는 바울의 지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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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46강) 반대파조차 포용하는 바울의 지도력
  • 승인 2009.11.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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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위하여 선택한 동역자는 실라(행 15.40)와 디모데(행 16.1-3)였는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디모데의 모친은 유대 그리스도인이었고, 그 자신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칭찬을 받는 자였다(행 16.2). 동역자로서 디모데가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했다는 것은 새로이 탄생한 이방인 교회들의 관심과 필요가 반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실라는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행 15.22), 이방인 교회들에게 공회의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되었던 인물이다. 안디옥에서 실라는 많은 말로써 그곳의 신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였다(행 15.32). 사실 누가는 실라를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바울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이방인 선교에 예루살렘 교회가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은 그 교회의 지도자 중 하나인 실라를 선교여행 팀에 포함시켰다.

사실 오늘날 선교를 포함하여 교회가 수행하는 많은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감정이 반영된 채 정책이나 주요 내용이 결정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의 성취가 방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반대파에 속했던 이를 자신의 선교 팀에 포함시킨 바울의 포용성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인간의 감정이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하겠다.

아울러 바울의 2차 선교 팀에 실라가 포함된 것은 바울의 선교를 지지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헌신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공회의 결정이 내려지자, 다시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확인이 되자, 이제는 적극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참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회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태도는 여전히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눈여겨보아야할 교훈이라 생각된다.

누가는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합의하여 만든 결정사항을 전달하면서 “그들이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라고 기록하고 있다(행 16.4). 이 ‘그들’ 속에는 디아스포라 교회들의 대표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 때 반목하는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교전략의 결과로, 교회들은 날마다 질적으로(“믿음이”), 양적으로(“수가 … 더하니라.”) 발전되어 나갔던 것이다(행 16.5).

이러한 긍정적인 면과 함께, 누가는 바울 선교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았다. 바울과 그 일행이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누가는 바울이 성령 하나님에 의해 제한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과(행 16.6), 두 번째는 비두니아로 들어가는 것을(행 16.7) 성령님은 제한시켰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6절의 아시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오늘날의 아시아(Asia) 대륙과 동일시하면서, 이 때 만일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왔다면 아시아가 오히려 기독교의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6절의 아시아는 비두니아, 길리기아, 무시아 등과 함께 당시 소아시아에 속한 여러 주(州)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령님의 제약으로 인해 망설이다가 마침내 드로아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선교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9절, 이 사건은 10장에서 베드로가 본 사건과 병행을 이룬다.). 즉 환상을 인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한 후, 바울은 마게도냐로 건너갔던 것이다(10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 중 하나는 바울이 유럽 선교에 대한 비전(vision)을 능동적으로 가졌기 때문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다가 허락이 되지 않자 드로아에서 기다리는 중에 이 환상을 피동적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환상과 비전을 혼동할 때가 있다.

알다시피 비전은 미래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계획이요 포부라면, 환상이란 이곳에서와 10장의 베드로의 체험에서 보는 바와 같이(행 10.17, 여기서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기 전 이방인과의 만남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환상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가 비전처럼 의도적으로 능동적으로 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분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 허락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을 ‘바울처럼 비전을 갖으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본문을 대단히 잘못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환상(헬라어, horama)이란 단어가, 비록 영어로 vision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그 의미는 something seen, 즉 “보여진 것”이라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앞서 ‘아시아’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본문을 곡해할 때 성경말씀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음으로, 우리는 항시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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