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13강)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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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3강)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의 완성
  • 승인 2008.08.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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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불법적 재판 (2)





누가복음에서 주님의 재판 사건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22:63-23:25). 산헤드린의 신문(訊問, 63:71), 빌라도(23:1-5)와 헤롯(23:6-12) 앞에서의 신문, 그리고 마지막 신문과 주님을 유대인들에게 양도하는 판결(23:13-25).

여기서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조금 참고하기는 하되 대체로 독립된 전승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막 14:53-15:20).

일련의 신문 이야기는,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도 그러하듯이, 연대기적 순서로 배열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23:13을 고려할 때, 최종 판결을 내리기 전 얼마간 휴회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이들은 이 기간이 하루나 이틀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간주하며 정죄하였지만, 그를 처형할 권세를 갖고 있지 않았다(요 18:31).

그리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대 관헌은 빌라도 앞에서 정치적 혐의를 추가하였던 것이다. 후에 그들은 바울에게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행 23:29; 24:5 이하). 그들은 반역과 종교적 신성 모독 등 여러 가지 복합적 혐의로 주님을 고소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약간의 효과가 있어서 우선은 총독의 인정을 받았고 다음에는 백성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20:20; 막 15:3; 요 18:33; 19:7).

예수님의 죽음에 있어서 누가는 메시야 고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22:7-38, 39-46). 이 이야기는 고난의 길(via dolorosa)의 역사적 과정을 해석한 것이다.


각 단락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강력한 의지를 강조한다. 주님의 결백이 분명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은 그들의 거짓된 속셈을 숨긴다(23:2).



비록 산헤드린의 정죄가 암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누가는 주님이 죄인이라는 명백한 판결을 생략한다.

호기심 많은 헤롯은 바라는 기적을 보지 못했지만, 단지 주님을 위험하지 않은 기이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빌라도는 다만 주님을 백성에게 양도한 것뿐이다. 결국 두 사람은 주님의 결백에 대하여 이중적으로(유대적 그리고 이방적으로) 증거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누가는 여기서 주님의 죽음에 대한 결정적 책임이 유대 민족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주님이 무죄하다는 빌라도의 세 차례의 선언(23:14, 20, 22)은 마치 빌라도를 주님을 위한 변호인인 것처럼 묘사한다. 누가 당시 불신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메시야는 반란으로 인해 처형되었다고 계속하여 주장했고, 또한 로마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누가는 주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사악함 증오 때문에 죽임 당한 것임을 주장한다(행 2:23: 3:14 이하).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빌라도의 죄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적 편의를 위하여 로마의 정의를 폭도와 같은 군중의 의지에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다. 세상은 그를 배척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누가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봄의 어느 날, 모든 사람이 거기에 관여되어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 빛에 대한 미움, 악한 호기심, 무관심, 편의주의, 그리고 두려움 등은 바로 주님이 처형될 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었던 특징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님은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신 채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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