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99강) 이생과 내세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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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99강) 이생과 내세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제
  • 승인 2008.04.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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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에 대한 논쟁




납세에 관한 논쟁에 이어 부활에 관한 논쟁이 등장한다(눅 20:27-40). 부활을 비롯하여 내세 및 영적 존재들인 천사와 마귀를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주님에게 던진 질문은 수혼(搜婚,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관습)에 관한 문제였다(신 25:5-6). 즉 자녀 없이 죽은 사람의 법적 상속자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 시대에 그러한 법은 거의 시행되고 있지 않아서, 이 질문은 다분히 학구적인 문제로 전락되어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그 계명이 토라(모세 오경) 안에 들어있고, 그리고 그 계명이 부활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토라가 내세(afterlife)에 대한 신앙을 배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사두개인들이 주님에게 돌리고 있는 부활에 대한 순진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망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법적 상속을 위한 자녀 번식의 수단으로써의 결혼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후 주님은 질문을 던진 사람보다 더 진지하게 이 질문을 다루면서 그가 제시한 답변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가정을 지적한다. 즉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 37절), 토라 또한 영생에 대한 신앙을 함축하고 있고, 따라서 바로 그 근거 위에 사두개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한 것이다. 무생물에게도 창조주는 있을 수 있으나,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고 말하였을 때, 이것은 아브라함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주님의 지혜로운 답변은 질문자를 압도하여 그는 감히 더 물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40절).

주님의 답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실제로 주님은 이승이건 저승이건 모든 삶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그렇지 못한 것은 결코 삶 혹은 생명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바른 교제가 시행되는 삶은 시간과 무관하게 곧 천국적 삶(heavenly life)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고 두 분 사이의 그러한 우정은 결코 죽음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적 실존의 끝이지, 본질적으로 영원성을 띠고 있는 관계의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으로 친구를 잃을 수는 있을 것이나, 하나님을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격을 띤 유대교의 한 종파였다. 그들은 토라, 즉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으며, 그 결과 그 안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았는데, 이는 바벨론 유수 후 페르시아적 사상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며, 그리하여 중간기에 기록된 묵시문학적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내세를 믿지 않았는데, 이 교리는 이스라엘 역사 중 매우 늦게 생겨난 것으로서 모세 오경 외에도 구약에서 거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참고 단 12:2, 사 26:19; 행 23:6-10)                                                             <백석대/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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