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학대와 아이의 장애도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연단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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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학대와 아이의 장애도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연단의 길”
  • 현승미
  • 승인 2009.09.02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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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양과 호스피스사역으로 새 희망 찾은 백 미 경 집사
“저에게는 특별한 프로필이 없습니다. 학력, 경력, 인맥은 물론 다른 이들과 비교해봐도 찬양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사실 저는 찬양사역을 해서도 안 되고, 그럴만한 실력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제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부르심에 따라 찬양사역자의 길에 들어섰다는 백미경집사(정읍시민교회).

모태신앙으로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다복하고 화목한 신앙의 가정에서 장녀로 자랐던 그에게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오랜 연단의 시간을 주셨다.

“어릴 적부터 제 별명은 ‘고물상 집 딸’이었습니다. 철없는 마음에 그 말이 너무 수치스러웠고, 항상 집에서 벗어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요. 그땐 결혼에 대한 의미도 잘 몰랐고, 그저 집만 떠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고물상을 드나들던 자원재생공사의 직원 한 사람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불쌍한 걸인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모습을 보고 어린 그에게 마음을 둔 것이다. 마침 백집사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 직원의 아버지가 혼사비용으로 300백원을 들고 찾아왔다.

▲ 간증집 ‘아직도 가슴으로 크는 아이’는 가장 불행한 여인에서 가장 행복한 사역자가 된 백미경 집사의 삶의 고백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가 사주신 예쁜 정장을 입고, 그 자원재생공사 직원을 따라나섰다.

“남편의 집이 김제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한테 인사시키기 위해 데려갔던거죠. 그저 엄마가 사준 새 옷과 그 분들이 사주시는 온갖 장신구에 들떠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했던 거였어요.”

그렇게 일주일 지난 후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집을 벗어났다는 행복감도 잠시, 남편은 한 달이면 25일을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심할 땐 폭력도 서슴치 않았다. 나중에서야 남편이 이미 오랫동안 신경정신과 계통의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혼한 지 일주일쯤 됐을 때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편이 알 수 없는 괜한 트집을 잡아 밥상을 엎기 시작했어요.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인데, 술만 먹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술이 깰 때까지 저를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괴롭혔지요.”

술주정뱅이 남편의 학대는 어린나이에 참을 수 없는 고문 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식들 중 한 명 정도는 믿지 않는 집으로 시집 가 그 집안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친정엄마의 바람조차 물거품이 돼가고 있었다. 아니, 그런 바람은 둘째 치고 백미경집사 본인의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 집안에 들어와 겪어야하는 연단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 놓고 교회에 갈 수도 없었지만, 고통과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지요. 그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첫째 아이가 태어났지만, 남편의 횡포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이에게까지 그 횡포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때까지만해도 일말의 희망이 있었지요. 하나님과 술을 먹지 않은 평소의 남편, 그리고 시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이 저에게 버틸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둘째 아이까지 갖게 되었지요.”

이미 남편은 모든 스트레스와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화를 술과 가족들에게 퍼붓는게 일상이 돼버렸고, 뱃속 아기에 대한 태교는커녕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었다.

“오직 아이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버텼지요. 책임감 때문이라도 남편이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예쁜 딸아이가 태어나 남편의 모습을 바꿔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러나 그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이었지만, 처음에는 유난히 긴 속눈썹의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예쁘고 순하게 잘 자라며 그의 희망이 돼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9개월이 되었는데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돌이 돼서도 걷지 못했다.

“늦되는 아이도 있다는 어른들의 위로를 믿었고 제가 보기에도 심각할 정도의 이상은 아닌 것 같아서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병원에서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조금씩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저 단순한 언어장애로 생각해 언어치료를 시작했던 그는 그곳에서 장애아를 둔 부모들과 교제를 하면서 조금씩 아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탈장으로 시작해 사시 판정, 그리고 언어 장애 등 계속해서 아이에게 이상현상이 발견됐다.

“내 아이보다 더 중증인 아이를 볼 때 이만하면 다행이다 싶다가도 정상인 아이들을 볼 때면 화가 치밀고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차라리 아이와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몸부림치기도 했습니다. 막상 장애심사를 하는 앞에 섰을 때도 좀 가벼운 평가를 받는 것이 제 자존심과 아이에게 상처가 더 작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아집을 버리지 못했었지요.”

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어리석은 시도를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둘째 아이 태옥이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아로 판정받았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실까 원망도 했고, 세상 모두가 미웠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당부로 간신히 유지했던 신앙심이 그 순간 저를 붙잡아주었어요. 하나님을 다시 찾도록 나의 모습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저의 변덕스런 감정은 편의에 따라 다가서다 물러서다를 반복했었지요. 그동안 원망에 찬 투정도 많았기에 한꺼번에 쏟아지는 죄에 짓눌려 무너지듯 쓰러져 무릎을 꿇고 처음 하나님께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호스피스 사역을 하시는 한 목사의 간증을 통해 호스피스교육을 받게 됐다. 호스피스교육을 받던 중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자신이 가진 기타실력을 선보이게 됐다. “겨우 찬양 3곡을 간신히 칠 정도의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순종했지요. 그때부터 찬양사역을 시작했지요. 사람들 앞에서 찬양을 부른다는 것이 여간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안에서 세상 누구도 주지 못했던 평안과 감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스피스사역과 찬양사역을 통해 넘치는 평안과 감사를 느낀 백미경집사. 기적처럼 암울하기만 했던 그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평생 술주정과 폭행을 일삼았던 남편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 부모회장으로 호스피스 사역으로 열심을 내는 가운데 만난 이들을 통해 자신의 마음도 치유를 받고 오히려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정부관계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새 삶을 살게 됐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새삼 깨닫는다는 백집사. 그는 자신의 삶을 세상 가운데 내려놓으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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