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나를 깨끗케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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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나를 깨끗케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 정재용
  • 승인 2009.03.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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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찬양사역자 영안교회 이 동 규 장로

“주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저 같은 사람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유년시절 겪은 6.25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만 했던 이동규장로(영안교회ㆍ양병희목사)의 고백. 온갖 고생과 가난으로 고난의 길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온 시간도 많았지만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후 마음의 고통과 육신의 고통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을 겪으면서 만난 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축복하시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저희 집안은 부유하게 살았었지요. 아버지께서 고향의 논과 밭, 산과 정미소까지 모두 팔아서 충남에서 사업을 크게 하셨는데 그게 잘 안돼서 모든 재산이 날아가고 결국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죠.”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여동생 둘만 남아 순식간에 소년가장이 되어버렸다.

“형님도 한분 계셨는데 소식이 끊어졌어요. 할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이일 저일 하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거나 다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죠. 그래도 찬송가 411장 ‘예수사랑하심은’을 부르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피난민수용소에서 전혀 알지도 못했던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찾아갔던 조그마한 천막교회. 그곳에서 배운 찬송이 이동규장로에게는 좋은 친구가 돼 집이건 들이건 앉거나 서거나 부르기만 하면 평안함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예수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잠잘 때만 빼고 계속 불렀어요. 얼마나 기쁘고 힘이 나고 용기가 나던지 찬송을 부르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피난민수용소를 떠나 돌아간 고향에는 교회가 없었지만 꼬마 이동규의 믿음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가장 가까운 교회가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동네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다녔는데 너무 멀어서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예배는 저희 집에서 함께 드렸죠. 함께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대표기도를 하고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은 뒤 합심기도를 드리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쳤어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기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에 힘썼던 아이들은 ‘하나님! 어린 양들이 여기에도 있으니 속히 목자를 보내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교회가 너무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어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어요. 김철구라는 장로님을 보내주셨는데 김충신이라는 별명을 사용하셨죠.” 꼬마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보내주신 장로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3년 6개월을 옥살이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신 분이었다. 영어와 중국어도 잘하시고 일어는 한국말보다 더 잘하셨던 장로님. 이동규장로의 기억에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첫 번째 그릇으로 기억됐다.

“하나님께서는 김충신장로님을 통해서 고향 이곳저곳 교회를 세우셨어요. 장로님께서는 피아노, 바이올린, 퉁소, 하모니카 등 악기연주도 굉장히 잘하셨죠. 특히 설교가 너무 은혜로워서 복음이 전해지는 동리마다 부흥하기 시작했어요.”

동네에서 5km쯤 떨어진 마을에도 김충신 장로님을 통해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된 유명한 목회자가 있는데 바로 여의도 침례교회 한기만 목사라고 했다.

“한번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가 여의도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한기만 목사님과 찍은 사진을 교회 입구에 걸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바로 그분이 어린 시절 제 기억 속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을 경험한 두 번째 목자셨죠.”

그렇게 김충신장로와 한기만목사를 통해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받았던 이동규장로는 할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군부대에 들어가 구두닦이와 접시닦이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일을 한다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고 전한 이장로는 작은 돈이었지만 가족들이 하루하루 연명해 나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동규장로는 구두와 접시를 닦는 보잘것 없는 그곳에서도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것을 목격했다.

“수천 명이 일을 하는 가운데 칼 파워즈라는 상사가 자신이 데리고 있던 한 아이를 미국으로 갈 때 데리고 갔어요. 그 하우스보이가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와 훌륭한 목회자가 된 감장환목사님이에요.”

이동규장로와 함께 구두를 닦고 접시를 닦던 소년이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집회를 인도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인상적이고 부럽기까지 했다. ‘얼마나 정직하고 착실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했으면 칼 파워즈가 본국으로 데리고 갔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나는 아직도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무식하고 무지하며 가난하고 무능하며 지렁이처럼 약하고 힘이 없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많은 병마에 시달리며 무력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데…’라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한때는 하나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어요. ‘하나님, 부모님이라도 늦게 데려가시던지 아니면  재산이라도 조금 남겨주시던지 시골에서 다섯 식구가 어떻게 살아가라고 모두 거둬가셨나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어찌 그렇게 차별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하시면서 어찌 그렇게 불공평하십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책임져달라고 울부짖기도 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이동규장로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 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말씀을 받고난 후 그동안 남에게 욕먹을 짓을 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던 죄인 된 모습들이 보였어요. 진심으로 뉘우치며 반성하며 마음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 했더니 저를 용서하시며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케 하셨어요.”

1995년 11월 신내동으로 이사를 하며 집근처 영안교회에 등록한 이동규장로는 수십년을 앓아온 질병들도 고침 받았다.

“저는 15년 동안 전립선을 앓고 17년 동안 손톱 발톱이 썩어져서 나왔어요. 그리고 20년 동안 천식을 앓고 위장병은 35년이나 앓아서 지금도 고기는 많이 먹지 못해요. 그런데 이 모든 질병이 깨끗해지고 있어요.”

새로 등록한 교회에서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는데 그 기도가 이장로의 마음속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후 손톱 발톱도 더 이상 썩지 않았고 기침을 한번 시작하면 끊이지 않았던 천식도 예배 중 대표기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고 간증을 전했다.

“제 삶을 돌아보면 김충신장로님이나 한기만목사님, 김장환목사님보다는 너무나 볼품없는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굶지 않게 잘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병까지 치유해주시는 큰 복을 허락하셨어요. 이제는 제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제 남은 삶을 바치려고요.”

배우지 못해 아무런 재주도 없지만 어린시절 배웠던 하모니카 실력만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이동규장로는 열심히 연습을 하기 시작해 지금은 세 번의 앨범을 낸 찬양사역자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 앞에 서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걸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에요. 사는 날 동안 할 수 있는데까지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요.”

오늘도 교회 복지관과 기도원 등을 찾아 작은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 찬양하고 있을 이동규장로. 이 세상 누구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엔 즐거운 마음으로 행진곡을 부르며 나가게 되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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