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정치 계절과 기독교적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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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정치 계절과 기독교적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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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1.1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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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엽목사<기독교정화운동 대표>


한해의 9-10월만 되면 각 교단들과 총회에서 교회의 정치의 계절이 도래 한다. 교계의 총회의 모임은 단연 총회의 장이 누가 되느냐에 초미의 관심을 쏟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매스컴들이 또한 이 문제에 대하여 한층 더 들뜨는 것 같다.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단독 회견을 하고 한 해의 정책을 묻고 방향을 가늠한다.

금후 교계의 발전 방향과 시도들을 가늠하는 일을 누가 나무랄 수 있으랴! 총회의 정책과 계획 시행방향들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아야 하고 따져보기도 하고 검토도 해 보아야 한다.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시도했던 일인가를 깊이 있게 검토하고 수정 보완함으로써 한국의 그리스도교회는 명실공히 발전하는 신앙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넘어서 지나치게 다스리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스리는 일은 당연히 필수적이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제되지 않은 인격의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권력을 부리고 빼앗는 것을 선호하면서 역사를 그려 온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죄악의 역사라고 규정 짓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고 자기의 목숨을 주는데 까지 희생하러 왔다는 교훈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현금 교계는 이런 말씀을 헌신짝처럼 여기면서 누가 더 높고 크냐를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생을 십자가에서 마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누가 더 크냐로 논쟁을 벌이던 한심한 제자들의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을 연상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조선일보 10월 30일, 31일자에 감리교의 감독회장 자리를 놓고 추태를 부리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어찌 감리교 뿐이겠는가? 장로교 성결교 기타 교단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여 친정부적 제스쳐를 쓰다가 불교의 반발을 산것이나 세속적 재판정에서 최고의 장 자리를 놓고 소송을 걸고 재판석에서 추태를 부리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가슴에 다시 한번 못을 박는 처사가 아닌가?

우리는 자기자신들도 추스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어떻게 낯을 들고 큰 소리를 치겠는가? 누가 신용하여 귀담아 말을 듣겠는가? ‘너나 잘 하시지’하고 비웃고 가버리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얼굴에 흙칠을 하고 먹칠을 갈기는 일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니 오늘날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보겠는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리다툼을 하고 일반 법정에서 높은 지위를 갖게 해달라고 애소하면서, 또 돈다발을 들고 표를 매수하면서도 높은 자리를 탐하여 찬탈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휘졌고 다니는 후안무치의 인간들이 지도자로 군림하는 날 어찌 그리스도의 선한 빛이 비출 수 있다고 하겠는가?

평화와 질서를 바로 잡고 번영을 구가하는 도화낙원은 아직 멀었다. 베옷을 입고 재무덤에 앉아 통곡하여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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