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부터 선교하고 주는교회로 지속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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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부터 선교하고 주는교회로 지속 성장
  • 이석훈
  • 승인 2008.04.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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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선교로 시작하여 오직선교로 오늘의 중형교회 이룬 '흥광교회'

 

빈민선교로 시작하여 창립 25주년 만에 중형교회를 이룬 인천시 연수구 동춘1동에 위치한 흥광교회(담임:장원기목사,
www.hkch.net/)는 도심 속 전원교회로 꾸준한 부흥을 이루고 있다.

봉재산 자락 높은 언덕 위에 1천여평의 주차공간과 봉재산숲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 속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뜨거운 주의 사랑의 교제와 성령의 뜨거움으로 ‘찬송이 살아있고, 기도의 뜨거움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로 자리잡았다.

 
1983년 1월 첫 주일에 남의 집 안방에서 첫 예배를 드린 후 12평에서 24평 그리고 가정집을 사 리모델링을 하여 노회로부터 설립공인을 받아 같은 해 6월 19일 설립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빛을 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흥광교회는 개척 초기 가난에 찌든 교인들을 일으키기 위해 ‘신협운동’을 펼쳐 오늘날의 부요한 교인들로 변화시켰다.

 
당시 교회가 위치한 송현동 지역은 인천에서 가장 소외된 인천제철 인근의 판자촌이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성도가 1백50명이 되도록 번듯한 내 집 하나 가지고 있는 성도는커녕 사글세 보증금조차 없어 방을 구하지 못하는 이들 뿐이었다.
 

장원기목사는 평소 알고 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신용협동조합을 찾아가서 성도들을 가입시키고 그 때부터 사글세 보증금을 빌려다 주고 그것을 다 갚고 나면 좀 더 큰 방 그리고 전세 보증금을 다 갚고 나면 독채 보증금을 빌려다 주고 또 다 갚고 나면 조그만 집을 사게 해 주고 또 그 빚을 다 갚고 나면 큰 집을 사게 해 주는 운동을 펼친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 직장을 구해주고, 무의탁 노인과 알콜중독자, 부랑자들이 죽으면 장례도 치러주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여 개척 초기부터 “작지만 좋은 일 하는 교회, 지역을 위해 일하는 교회”로 소문나면서 자연스럽게 전도가 돼 오늘에 이르렀다.
 

빈민선교의 일환으로 이 교회는 송현동에 있을 당시부터 무의탁노인과 소년소녀가장들에게 김장을 해주는가 하면 성탄절과 추석 등 명절에는 쌀과 라면을 사서 전달하는 등 생활에 도움을 줌으로써 간접선교의 효과를 거두었다.

 
흥광교회는 개척 때부터 “선교하고 주는 교회가 되자”고 기도했기에 그 달부터 전북에 있는 섬교회 선교를 시작했고, 해마다 선교하는 교회를 1교회씩 늘여나가 지금은 60곳이 넘는 교회와 단체들을 섬기고 있다.
 

“도시교회는 농어촌교회의 빚진 교회”라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임하고 있다. 이 선교사역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계속 될 것이며,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금도 재정의 십일조는 선교비로 지출한다는 방침 아래 선교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빈민선교로 시작하여 농어촌 선교와 해외선교, 노인복지선교, 장애인선교 등 온전히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가 지원한 농어촌교회에서 자녀들이 도시로 오면 다 흥광교회로 보내주어 ‘되로주고 말로 받는’ 그야말로 심는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해외선교 역시 복음의 빚진 나라로 이 복음의 빚을 갚은 교회가 되기 위해 매월 선교주일을 지켜 선교비로 보내고 재정 또한 예산을 책정하여 해외 선교비를 늘려가고 선교지도 늘려가고 있다. 현재 호주와 파라과이에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일본과 필리핀, 러시아, 베트남, 멕시코, 우즈베키스탄의 선교사들을 협력하고 있다.
 

노인복지선교 역시 이 교회가 중점을 두고 전해하는 사역 중 하나이다. 지역의 60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겨울에는 최고급 속옷을 선물하며 어버이주일과 추석 등 명절에는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을 며느리나 자식들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또한 1년에 두 차례씩은 효도관광을 시켜주어 실컷 먹고 놀고 싸갖고 가게까지 하고 있으며, 독거노인들을 위해서는 쌀과 반찬을 전달하고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게는 용돈을 주는 등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노인들을 온전히 섬기고 있다.
 

앞으로는 교회 내 ‘선교관’을 지어서 무의탁 노인들을 모실 시설을 갖추고, 지역사회를 위해 섬길 수 있는 터전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흥광교회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어린이선교에도 앞장서고 있다. 지역에 젊은층이 많은 영향으로 어린이집을 통한 전도효과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방과후교실을 넘어선 학원을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의 공간마련도 기도제목 중 하나이다.

 
또한 교통장애인선교회 실무자를 선교목사로 두어 장애인선교까지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선교와 함께 교육과 예배를 통한 성도들의 영성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성경대학을 통한 체계적인 성경공부와 새가족들을 위한 새가족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장원기목사는 가능하면 주일 낮 예배는 ‘본문설교’를 통해 성경전체를 주제 삼아 이해하기 쉽게 말씀을 풀어주고 있으며, 새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으면서 간단히 설명하고 기도를 많이 하게 한다.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예배에서는 철저한 강해설교로 신구약의 교리적인 부분을 강조한다. 특히 최근에는 이단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에 말씀으로 신앙을 굳게 다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금요철야예배에서는 찬송과 기도를 뜨겁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교회’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즉, 지적이 것과 영적인 영성을 균형있게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25년 전 5가정이 모여 남의 집 안방에서 시작, 개척예배시 귀신쫓은 일이 소문이 나서 5개월만에 1백명으로 늘어나고 1999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와 출석성도 2천여명(주일학교 포함)으로 성장한 흥광교회는 교회 옆 시유지를 매입하여 2천여평의 부지로 확장됐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시기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했던 IMF 기간이었다. 성도들에게는 부담감이 있었을 터였지만 한 가정도 흩으러짐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자리를 굳게 지켜주고 있다. 자동차로 30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다. 장원기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언제나 성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으며, 다른 목사들도 한 목소리로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흥광교회에서는 언제나 건축헌금도 모두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담임목사의 노력을 아는지 성도들도 기쁨으로 건축헌금을 작정하면서 담임목사와 뜻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고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중 누군가를 헌신시킴으로써 그 일을 감당하게 하는 일들이 여러차례 있었다. 그 중에는 전세를 사는 성도가 사글세로 줄이면서 건축헌금을 했으며, 노인들도 건축헌금을 하기 위해 공장에 다니는 일까지 있었다.
 

이같은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신은 ‘선교하는 교회, 주는 교회’를 실천하기 위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또한 장원기목사가 오랜 기간 총회 해외선교위원장을 맡아 마음껏 선교할 수 있도록 지원한 힘의 근원이 되고 있다.

 
교회를 이전 한 후 증축공사를 몇 번씩 걸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현재 교회는 예배당이 좁아 3부예배에는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 지경이다. 서두르지는 않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체육관식 본당을 건축해 무료예식장과 노인선교 등을 본격적으로 펼쳐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온 성도들은 기도하고 있다.
 

주변 지역이 계속 개발될 예정이어서 흥광교회의 새 성전 건축을 위한 기도는 멀지 않은 현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원기목사


“뒤 돌아보면 오직 감사한 일 뿐입니다”


“남들이 다 떠나는 어려운 곳에서 어렵게 성장한 교회이기에 뒤를 돌아보면 감사한 일 뿐이고 오늘날의 좋은 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심 또한 남보다 잘 난 것이 하나도 없는 나에게 주신 것으로 믿을 때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장원기목사는 큰 풍파 없이 30여년을 목회해 올 수 있었던 요인은 조상들이 믿음으로 심어놓은 신앙의 열매를 따 먹는게 아닌가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다.
 

흥광교회는 교회의 분명한 비전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보여달라고 1982년 12월 산으로 올라가 일주일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전라도 진도 출신인 장원기목사는 모태신앙이다. 100년 전 미국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됐으며, 장 목사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이 곧 일상생활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었다. 고향에 첫 번째 교회를 세운 조부의 신앙으로 인해 4대째 신앙을 이어받은 장 목사는 집안의 7호 목사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1956년 장로가 된 조부는 온전히 주의 종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형제들로부터도 ‘성자’란 소리를 들었다. 조부의 10형제 중 3명이 목사가 되었으며, 부친의 동생 3명이 목사가 되어 장 목사가 7호가 된 것이다. 이후 집안 동생들이 5명 목사가 되어 3대에 걸쳐 목사가 12명이 나왔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가족들은 장로나 권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어 장 목사를 위한 기도의 후원자들이 되고 있다. 이것이 부족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잘 봐주는 것으로 장 목사는 믿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축복 뒤에는 어머니의 베품의 삶이 자리잡고 있었다. 생전 보릿고개 시절 오일장이 서면 가마솥에 밥을 가득 해서 국과 함께 놔두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먹고 가고 했다.

 
장 목사는 시골교회가 목회자가 없어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인 교회에서 중학교 2학년때부터 군입대까지 강단에서 설교를 했다. 군 입대 후에는 부대에서 연대교회를 개척하여 저녁예배를 직접 인도하기도 했다.
 

장 목사는 신학을 하면서 제2동인교회를 개척하여 4년 정도 담임 교역자를 맡기도 했다.

장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소명으로 1983년 송현동에서 흥광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송현동은 인천제철 숙소들이 있었던 곳이며, 가장 가난한 동네로 화장실 시설 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던 곳이었다.

 
장원기목사는 개척 당시부터 성도 뿐만이 아니라 목사들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경매에 들어가 길가로 나앉게 될 처지에 있는 교회를 구해 준 일도 여러차례 있었다.
 

이같은 신협운동을 통해 성도들의 생활이 나아지고 내 집을 장만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장 목사는 큰 보람과 함께 온전히 감사할 뿐임을 고백하고 있다.

 
현재 예장 합동정통 총회 부총회장을 맡아 오는 9월 총회장을 앞두고 있는 장원기목사는 그동안 노회장과 총회 청년국장, 선교위원장, 서기 등을 두루 거쳤으며, 국제기아대책 기구 인천본부 회장과 서울경찰청 교경중앙위원, 인천경찰청 경목위원 등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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