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두 가지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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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두 가지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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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8.0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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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복목사<할렐루야교회>


키르기즈스탄 공항에서 나와 아내를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딸과 둘째 손녀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4년 만에 딸이 가 있는 선교지를 처음 찾아온 아빠와 엄마를 떠나보내는 딸과 손녀의 마음을 어찌 모르랴!


내 눈물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첫째, 자식을 향해 애처로워하는 부모의 눈물이었다. 열악한 환경 여건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아픈 가슴이었다. 다섯 시간 동안 험한 길을 운전해온 딸이 우리를 배웅하고 다시 다섯 시간 그 험한 길을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서 모슬렘들이 사는 열악한 작은 동네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뒤에 남겨 놓고 떠나야 하는 아빠의 마음은 안타까웠다.


작은 체구에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실천하며 살려고 애쓰는 딸과 사위,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또래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어린시절을 살지 못하고 문화적, 교육적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자라고 있는 손자와 손녀들, 갑자기 코가 찡했다. 선교사 수련회를 마치고 그들이 사는 시골 동네로 3시간을 운전해 갔다. 높고 좁은 갈라진 절벽 사이를 위험스럽게 빠져나가자 작은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그 동네는 동서로 연속 되는 길이 하나뿐이었다. 그 길을 만나 왼쪽으로 조금 가자 오른쪽에 이슬람 모스크가 보였고 모스크 건너편 길 코너에 딸이 사는 집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갔지만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학 이후 미국 생활 26년, 한국 생활 17년 동안 선진문화에 익숙한 나에게 오랫동안 별로 본적이 없는 허술한 집이었다. 그 거울의 밑은 깨어져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손주들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더 충격을 받았다. 방 하나에 아빠가 직접 톱으로 자르고 못을 박아 만든 두 개의 벙커 베드와 바닥에 있는 한 개의 침대. 그들이 미국에 살고 있었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 애들의 방은 캐노피가 올려져 있는 공주의 방과 같은 아름다운 침대가 있는 깨끗한 방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지난 날 주거 환경이 내 머리를 스쳐갔고 가슴이 아팠다.


이 아이들이 이렇게 사는구나! 먹고 싶은 음식을 구하려면 다섯 시간의 험한 길을 운전해 가야 큰 도시에 가는데 이 험한 길을 해외에서 손님이 한 명이 찾아와도 오르내려야 한다. 1991년도 자동차는 계속 덜거렁 거렸다. 자동차의 스프링과 쇼크 오브소보가 견뎌 내지를 못했다. 미국에서 스프링을 특별 주문해 바꾸어 달았지만 그 길에서는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기차도 버스도 없는 동네이다. 나는 그 순간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자식을 가진 한 명의 아버지였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공항에서 작별의 눈물은 그 삶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아빠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내 눈물의 두 번째 의미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다. 사랑하는 딸이 그런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었더라면 현대의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부모가 얼마나 비통했을까?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21세기 모든 혜택을 다 누리며 살 수 있지만 또 살고 있었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어려운 나라에 가서 가난하고 병들고 어두움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전하고 싶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과 함께 그렇게 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기로 선택했다. 그런 삶을 마다하지 않고 지역을 개발하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려고 스스로 헌신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고마웠고 감격했다. 이런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의 눈물은 뜨거운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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