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지혜보다 천국을 사모한 ‘손양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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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보다 천국을 사모한 ‘손양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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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6.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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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희권사<손양원목사 딸>


손양원목사는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비가 없어서 낮엔 신문배달, 우유배달, 만두장사를 해서 야간학교를 다녔다. 저의 어머니와 결혼 후엔 평양신학을 마치고 나병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했다(1939년, 7월). 이 나환자들은 가지각색의 끔찍한 모습들이다. 손양원목사는 이들을 너무 사랑했다. 이들을 위해 손양원은 ‘기도시’를 썼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환자들과 손양원은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1940년 9월 25일 손목사는 신사 참배 반대로 일경에 끌려갔다. 만 5년 동안 갖은 고난 끝에 하나님께서 8•15해방이란 선물을 주셔서 끝내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그리하여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가족은 옛날에 살았던 애양원 사택으로 되돌아와서 그간 신사참배 때문에 못 갔던 학교도 다닐 수 있어서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 행복은 절정을 이루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1948. 10. 19일 내가 순천 매산 여중 1학년 때(16세), 이 날에 뜻밖에 공산 게릴라들이 여수, 순천에서 대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여수, 순천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꼭 1주일 만에 끝냈다. 1주일 동안 여수 순천 두 지역에서 사망자 숫자는 3천5백여명이었다. 이 때 내 두 오빠(동인 오빠 25세, 동신 오빠 19세)는 꽃다운 나이에 같은 동료 친구들에게 끌려가서 한 날 한 시에 총살 순교당하고 말았다(1948, 10, 21일). 뜻밖의 두 오빠 죽음이 온통 울음바다를 이룬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었다. 두 오빠 장례식을 마치고 1주일 쯤 지났다. 동인, 동신을 죽인 놈을 잡았다. 그 놈은 큰 오빠 같은 학교 학생 강철민(가명)으로 밝혀졌다.


난 이 소문을 들었을 때, 두 오빠 죽인 놈을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손목사는 두 오빠 죽인 강철민을 사형대에서 빼내어 양아들 삼겠다고 하셨다. 나는 펄펄 뛰며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아버지는 왜 항상 별난 예수를 믿습니까?”하고 적극 반대를 했다.


두 오빠 순교 후 2년 뒤, 1950년 6•25가 또 터졌다. 공산군들은 물밀듯이 남침해 오고 있었다. 아버지 친구들(목사)이 몰려 와서 피난 가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거절하셨다. 이 때 피난 가지 않으면 죽는 것은 규정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양 먹이는 목자가 내 양떼 신앙을 지켜야지 더구나 몸도 성치 않는 나환자를 버리고 나 혼자 살자고 어디로 피난 가겠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끝내 피난 가지 않았다. 9월 13일 공산당들은 애양원에 들이 닥쳤다. 아버지는 강단 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아버지를 낚아채 갔다. 9월 28일 이들은 후퇴하면서 아버지를 끌고 여수 밑의 미평, 큰 과수원 속에 끌고 가서 총살했다. 아버지 손양원목사는 48세의 한 많은 생을 순교의 재물로 마감했다.


손양원목사는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고난은 최고의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이런 시를 써서 보냈다.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됐지만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입니다.” 아버지 손양원목사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추구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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