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겸손으로 바울의 고난을 즐긴 ‘이기풍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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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겸손으로 바울의 고난을 즐긴 ‘이기풍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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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6.1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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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례권사<이기풍목사 딸>


나의 아버지는 섬이나 농촌 시골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시던 개척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내가 어린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녔다. 이삿짐에서 아버지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셨던 물건은 큰 벼루와 먹, 그리고 아주 큰 붓과 중간 붓, 다음에 제일 가느다란 붓이었다.


첫째 가훈은 관용이다. 청년 시절 예수를 믿은 후에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나셨기 때문에 더욱 관용하신 아버지였다. 항상 상대방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시어 때로는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끝까지 상대방을 도와 주셨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7년에 한국 초대로 일곱 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셨다. 독노회가 조직이 되고, 1908년 2월 달에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렀고, 같은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완전히 말과 풍속이 달랐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제주도에 아주 큰 홍수가 나서 관덕정 옆으로 흐르고 있는 냇물에는 급물살에 돼지가 떠내려 오고, 고리짝도 내려오며, 어떤 집 한 채는 산산이 부서진 채로 떠내려 왔다. 제주도 주민들은 양쪽으로 늘어서서 가슴 아픈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야 저 위에서 사람이 떠내려 온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상류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40대나 되어 보이는 여인이 큰 통나무가지에 매달려 떠내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대열에서 가슴 아픈 광경을 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여인을 발견한 즉시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속바지만 입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여인이 가까이 오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물에 첨벙 뛰어 들어가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여인을 언덕으로 밀어붙였다. 제주도 주민들은 아버지를 보자 깜짝 놀랐다. 그렇게도 자기들이 박해했던 야소교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각기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크나큰 홍수를 통하여 교회에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다.


두 번째 가훈은 백인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참으셨다. 1907년에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받으신 후 즉시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인천까지 걸어오신 후 인천에서 조그마한 동선을 타시고, 서해바다를 건너 목포까지 왔다. 이때도 풍랑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말씀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니다. 목포에다 어머니를 두시고 1908년 2월 달에 아버지 홀로 제주도를 향하여 돛단배를 타셨다. 사공이 노를 저어서 제주도에 가까운 추자도 섬 근방에까지 도착했을 때 심한 조류에다가 강풍이 몰아쳐서 갑자기 배가 뒤집어지면서 파도로 인하여 동선이 산산 조각이 났다. 아버지가 물 위에서 하루 반(36시간)을 표류하고 다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 부르짖는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저를 살려 주셔야 제주도의 불쌍한 영혼을 살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옵소서.”


세 번째 가훈은 겸손입니다. 이 가훈에 대하여도 아버지의 교훈보다 어머니의 생생한 가르침을 더 소개하고 싶다. 어머니는 외유내강의 저력을 가지셨고 말할 수 없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다. 


어머니도 목회자의 아내로 누릴 영광에 관심을 두신 적이 전혀 없고 관용하여 피전도자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며 사랑하셨고, 처음 예수 믿을 때의 핍박을 참고 참은 것은 물론 전도받는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에 이해할 때를 기다리며 끝없는 인내로 참으셨으며, 겸손하여 어렵고 낮아진 사람들에게 혹은 버려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다가가 돌보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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