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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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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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2.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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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목사<의왕중앙교회>


사람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모습이 있다.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이 서로 다른 모습의 두 얼굴을 한 몸에 지니고 산다. 고품격의 인격적 품성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평화로울 때의 모습과 분노와 격정과 다툼이 있을 때의 모습 등이다. 서로 다른 인격체인양 숨김과 들어냄이 적대적일 수 있지만 두 양태가 다 내 안에 부조화가 없는 양 잘 어우러져 있는 양면성이다.


밀림의 맹수에게도 서로 전혀 다른 두 모습이 있다.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의 서로 다른 모습이다. 배고플 때 맹수의 눈에서는 불빛을 뿜어낸다. 먹이를 찾고 있거나, 먹이를 발견했을 때의 맹수의 본능은 긴장 그자체이다.


지축을 흔드는 포효와 함께 먹이를 향하여 공격해 가는 모습이야 말로 번개와 같다. 굶주린 사자여야 사냥을 위한 공격 중추가 자극을 받아 사자 본연의 왕 같은 용맹스러움을 드러낸다. 사자가 살아 있는 순간이고 사자임을 증명하는 때이다. 동물원의 사자, 길들여진 사자, 배부른 사자에게는 야생의 생명력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긴장이 없는 맹수에게서 번뜩이는 어떤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서도 신앙인다움을 가지려면 영적 전쟁터의 전사와 같은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영적 긴장감을 요구 받는다. 신앙인이 신앙인다우려면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그 복음의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긴장을 가져야 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다. 바울의 긴장된 신앙의 고백이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여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내면 다른 곳에 다른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이 마음에 분란을 일으키고, 누르고, 아직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죄가 자신을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기에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자신의 곤고한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탄식과 함께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작은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바울 같은 거룩한 긴장이 없이는 신앙인다울 수가 없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서는 주님만을 향한 매서운 신앙의 눈빛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먹이를 사냥하는 사자의 눈빛을 요구받는다.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곤고함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누가 곤고하기를 원하겠는가? 한 순간이라도 평강과 안위를 바라고 소망한다. 그러나 실로 영적 긴장이 없이는 진정한 평강과 안위는 없다 샬롬의 은총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긴장감은 내 삶에 조성되어야 한다. 로마가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그 후에 우리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대사명이 사라져 버렸다. 신앙인으로서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 말이다. 복음을 증거 할 필요가 사라졌고, 교회가 출세의 장이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관이 되고, 귀족이 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교권싸움이 당연하여 철저히 타락하고, 철저히 망가졌다. 결국 예수와 상관없는 복음 없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온 세상을 기독교가 지배하던 그 시대를 후세 사가(史家)들은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게까지 되지 않았는가.


신앙의 긴장감이 조성되어야 하고, 긴장 있는 신앙을 가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병은 치유될 길이 없다. 무속과 구분이 안되는 교회, 길흉화복을 점치며, 물량주의에 매달리는 교회로부터 성경적 신앙을 회복시킬 방도가 없다. 한 없이 늘어지고 태만해져서 결국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각까지를 상실하게 되고 말 것이 때문이다.


흔들림이 없는 신앙인은 그것과 비례하여 사모함을 받는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사람, 고백적인 삶을 살고자 애쓰는 사람은 결국 존경받게 된다. 조그마한 유혹의 가능성도 제거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신령적 긴장감을 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역사가 증인이다. 오늘의 시대에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상황 중에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번민과 곤고함을 즐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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