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아버지상 강요 ‘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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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아버지상 강요 ‘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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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6.0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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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주기도문 번역안의 ‘아버지’ 호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최영실 교수<성공회대학교>


희랍어 본문은 마 6:9a에서 호격으로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여’하고 부른 다음에 9b, 10a, 10b에서 모두 2인칭 대명사 속격인‘sou’(당신의)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서와 공동번역은 이것들을 모두 ‘아버지의’라는 말로 번역하고, 주기도문 번역을 위해 김창락교수가 최근에 새롭게 제시한 내용에서도 ‘아버지의’를 첨가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라는 말이 희랍어 본문에 없는 것을 감안한 것인지 그것을 괄호 속에 넣어서 제시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희랍어 본문에는 그 어디에서도 ‘아버지의’라는 말은 소유격 명사로 사용되지 않았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버지의’가 아니라 ‘당신의’라는 2인칭 대명사이다.

여기에서 예수가 강조하는 것은 가부장적 의미에서의 ‘아버지의 이름’이나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에 대립되는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가르친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여!’라는 간구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의 아버지는 결코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편집사적으로 볼 때 마 6:9의 아버지는 5:45-48과 6:6-8, 32-33의 아버지를 뜻한다.

만일 마태복음의 이러한 아버지 상이 단지 남성으로, 가부장적인 아버지 상으로 강요되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다면 우리는 과감히 이 아버지 칭호를 전체 본문에 비추어 새로운 용어로 탈 가부장화 시키지 않을 수 없다.

성서는 분명히 가부장적 시대의 산물이며 남성 저자에 의해 씌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서 안에서 여성에게 ‘떡이 되는’ 자료만을 발췌하거나 여성에게 걸림이 되는 것들을 무조건 삭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말 문법상,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이라는 칭호를 ‘신’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혹자는 2인칭 대명사인 ‘당신’ 이 극존칭을 뜻한다고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 6:9-10에서 ‘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으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13b에서 ‘당신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로 되어 있는 것들을 공동번역처럼 모두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것’으로 번역해 놓은 것은 마태가 강조하고 있는 신학적 의도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청중들에게 ‘나의 이름’, ‘나의 나라’, ‘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 6: 9-15의 본문에서 ‘아버지’ 칭호는 9절에서 단 한번, 호격으로 표시되어 나타난다. 그것을 직역하면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여’다. 마태가 말하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누가는 당시의 그리스인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없었던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여’라는 마태의 진술에서 ‘하늘에 계신’을 삭제하고, 단순히 ‘우리들의 아버지여’로 변형시켰다.

그렇다면 신을 가부장적 아버지로 오해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이 아버지 칭호를 위의 내용에 맞추어 탈 가부장적 용어로 변형시키거나, 각주를 달아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기도문을 오늘날의 컨텍스트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하여 번역하고, 창조적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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