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통일 대비한 ‘선교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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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가 통일 대비한 ‘선교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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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4.0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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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식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


북한은 신격화된 사회로 종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탈북자들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종교 자체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북한 사회에서 배운 인식의 틀로 기독교를 수용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문화 체계에 따라 교회의 모임과 행사를 판단하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선교를 본질로 한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의 제도와 구별되며 사회봉사기관과 NGO와도 구별돼야 한다. 이런 사실을 탈북자들이 잘 인식하고 현실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교회의 지체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단순히 동정과 구제의 대상자로 볼 것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헌신하고 봉사하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양육해야 한다. 탈북자들이 신앙의 성장과 더불어 이러한 교회관과 선교관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가 되라는 비전과 소명을 발견하도록 교회는 영적, 물적 자원을 나누고 섬겨야 한다.

선교는 변화하는 것이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상 대위임이요 최대의 과제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악습과 퇴폐와 미신과 거짓을 변화시키며 역사와 문화와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변화하는 선교의 전부는 아니다. 선교는 선교하는 자기 자신의 변화도 전제하고 동반한다.

선교는 교회 개혁과 자기 변화로부터 일어나야 진정한 성육신적 선교가 이루어진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는 바로 이런 선교관을 잘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탈북자 선교를 하려는 교회는 먼저 교회다운 교회인지, 정말 인간의 혈육이나 전통이나 문화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후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자문하며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다른 기관과 조직과 다른 점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마 10:9) 선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마 16:24, 막 8:34) 선교에 있다. 복음에 빚진 자된 교회는 탈북자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말이나 돈으로 하는 선교가 아니라 삶을 통한 선교가 가능하도록 자기 갱신을 하는 가운데 양육 공동체를 이루어감으로써 바른 선교를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탈북자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전 이해를 가지고 있다. 부모 자식과 생이별을 한 경험과 처절한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면서 한계 상황을 체험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북한 체제와 교회 체제가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지를 명확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

탈북자가 교회에 다닐수록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탈북자들이 너무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교회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이 더 큰 이유다. 여러 교단으로 분열돼 경쟁과 갈등을 하고, 돈으로 선교를 하고, 진정으로 가족과 같이 사랑하지 않고, 탈북자를 단순히 선교의 대상화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본질에 충실하며 세상의 어떤 기관이나 단체와 다른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 거듭나서 탈북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으로 신앙 양육을 하면 통일 후 북한 주민에게 가까이는 다른 믿지 않은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귀한 초석이 될 것이다. 탈북자가 남한 교회와 함께 선교의 주체가 될 때 앞으로의 선교는 통일 이후의 갈등을 대비하고 마음의 통일, 사람의 통일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탈북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선교방법

탈북자들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은 고차원적이고 내세적인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와 필요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소위 ‘이등 국민’으로서 ‘다름과 차이’를 ‘차별’로 쉽게 단정하는 한국 문화에서 겪는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도구가 되기에 신앙을 가진다. 그런데 시혜자 의식으로 생색을 내는 교회의 구제와 사려 깊지 못한 자세로 인해 실질적인 도움은커녕 오히려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탈북자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몇 가지 선교 방안에 대해 제시한다.

첫째, 탈북자 중심의 선교 방안. 탈북자들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주로 누구와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교회를 포함한 민간단체 전체가 1.3%밖에 안된다는 연구보고는 교회의 현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둘째, 탈북자의 생존과 생활을 지원해야 한다. 2001년 통일부의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1996년부터 2001년 5월말까지 입국해 하나원에서 실시하는 사회적응 교육을 이수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전체 7백21명의 탈북자 중 6백26명(86.8%)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생계지원을 받고 있다.

언제까지나 탈북자들이 정부나 교회 및 사회봉사단체의 지원에 의존해 살 수는 없고, 이것은 탈북자들 스스로가 가장 혐오하는 일이다. 그들은 대개 자립심과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으로 살려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선교 전통에 길이 빛나는 ‘네비우스 방법’으로 알려진 3자 원리를 탈북자 선교에도 적용해야 한다. 곧 자립, 자치, 자전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교인의 가정과 탈북자 개인 혹은 가정과 자매결연을 맺는다거나 입양을 한다거나 아니면 의형제를 맺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진정한 가족적인 사랑을 느끼도록 지원함으로써 마침내 이미 믿는 탈북자들이 다른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한 교회가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의 탈북자와 자매결연 내지는 입양해서 정신적, 문화적, 경제적 도움을 통해 자립적인 입지를 세우는 사역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미 성공적으로 이런 사역을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입양한 것은 아니지만 친자식 이상으로 탈북자의 결혼과 신앙생활과 사회 적응을 위해 책임감 있게 헌신하는 훌륭한 성도도 있다.

탈북자에게 교회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와 너무 흡사하다고 한다. 여전도회는 ‘여성동맹’과 같고, 남선교회는 ‘남성직능동맹’, 구역예배는 ‘가두생활’과 비슷해, 탈북자들은 공동체 생활에 질렸다. 여기에 학습과 자아비판은 교회의 교육과 회개와 너무 유사하다. 교회를 한번이라도 빠지면 걱정해서 전화를 하지만 전화를 받는 탈북자에게는 강요로 느껴진다.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은 10계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탈북자들 중의 일부는 ‘신자’가 되는 것은 ‘당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길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즉, 북한에서 일상적으로 행했던 것과 똑같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 결과도 역시 사회적으로 보상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북한의 의사 출신 탈북 여성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북에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자세에 비추어 남한에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중심 원리인 기독교 사상을 따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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