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스님의 단식, 종교적 의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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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의 단식, 종교적 의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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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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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과 `단식`이 갖는 종교적 의미

최근 우리사회에 보도매체의 논점(issue)이 되었던 국책사업인 천성산 고속철 터널공사와 관련한 ‘내원사’(內院寺) <지율> 여승의 백일단식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석연찮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단식 동기는 천성산 늪지대에 서식하는 양서류(兩棲類)인 도롱뇽의 생태계 보존을 위해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저항이었다. 삶의 환경 보존은 인류적인 가치이므로 여기에 이론의 여지는 없으나 몇 가지 지적될 부적절한 점이 있다.


첫째, 종교인의 단식은 종교적 동기와 의미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입장이라면 성경의 근거를 교훈삼아 ‘회개를 목적으로’(삼하12:16, 느9:1-2, 삿20:26), ‘기도응답을 목적으로’(스8:21), ‘영적 은사를 얻기 위해’(행9:1-3), ‘시험을 이기기 위해’(마4:2), ‘육체를 쳐서 복종키 위해’(시109:24),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 위해’(마6:16-18), ‘죄를 끊기 위해’(사58:3-6), ‘평탄한 길을 간구하기 위해’(신9:18, 삼상7:5-6, 욘3:5-6) 금식을 하는데 이러한 동기가 없이 고행주의나 자학적 금욕주의, 자기의 뜻의 성취, 초인적인 종교력의 과시 등이라면 순전한 단식의 참 뜻은 될 수 없다.


둘째, 불교적 관점에서 지율 여승의 단식은 재속(在俗) 재가(在家)에서 출가(出家)하여 불문(佛門)에 입적한 사신(捨身)으로서 탈속(脫俗)한 수도(修道)자의 본분은 깨달음이나 수행일 것인데 사바탁세(娑婆濁世)의 환경문제에 집착하는 일은 구도(求道) 수행자의 올바른 자세로 볼 수 없다.


셋째, 종교인의 신분으로서 사회적인 관심사를 두고 생명을 담보하여 극단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출가(出家)이전의 속세의 모습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종교 이념적 모순에 빠진 점이다.


넷째, 종교인의 단식은 신과 연합을 도모하고 자기성화(정화)의 의미를 지녀야 하는데 종교영역과 직접 관련이 없는 국책사업인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관한 일을 두고 한 사람의 종교인이 소위 원력(願力)을 표현한 것은 설득력 있는 처사라고 볼 수 없다.

다섯째, 불교인이라면 법력을 통해서 인간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본분일 것인데 존엄한 생명을 버려 자연을 구한다는 가치의 역리(逆理)는 수긍이 되지 않는다. 물론 천성산 늪지대의 생태계 보존이 중요하고 살생유택의 이념적 가치가 귀하다고 해도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얻어질 자손만대의 윤택한 삶과 복지를 증진할 공익적인 가치와 바꿀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굴착공사로 인한 피해의 개연성(蓋然性)일뿐 검증 없는 우려만으로 국가적 기간산업이 중단되거나 철회 할 명분은 없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금식(단식)의 필요의 원리와 그 관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개인적인 목적이나 사회적, 정치적 관심사를 위해 절식(絶食)하는  일은 소영웅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개인의 저항에 부딪혀 중단될 만큼 명분이 약한 국책사업은 국가적 권위만 훼손될 뿐 여과할 수 있는 기능이 우리 사회에 과연 없는 것인지  자문해보고 싶다.


모든 종교인은 바른 금식과 의미 있는 단식으로 종교력을 높여야 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극복과 신앙향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회적 요구가 오도(悟道)의 영역으로 간주(看做)할 사람은 우리 사회에는 없다.  


 


 

김석한 / 교수. 천안대 신대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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