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국가 정책을 흔들 수 있는 우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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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국가 정책을 흔들 수 있는 우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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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2.1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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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총장 / 한일장신대학교


개인의 의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와 국가에서 태어나 자라고 오늘을 산다는 자부심이 일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껏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내 개인이나 내가 소속한 집단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길을 배웠다는 데 대한 잔잔한 반가움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어떤 정책도 다수의 의견보다 소수의 의견을 더 소중하게 고려한다는 교훈도 매우 값지다. 그것이 국민에게 막대한 재정적인 부담을 주더라도 내 개인이 극한의 방법을 택하여 투쟁하면 다수의 의견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데 더욱 신이 난다.

이상의 서술은 참으로 보기 드문 쾌거의 소식이다. 그러나 선뜻 상쾌한 승전보로 받아들이기에는 어쩐지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 우선 극한적인 투쟁을 공사가 시작하기 전에 해주셨더라면 하루에 70억 원의 우리의 세금이 손실되지 않아 좋았을 것이고 새로운 사회의 여론이 분열되지 않아 좋았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국가정책의 권위가 손상당하지 않아 좋았을 것이라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런데 문제는 정당한 절차를 밟아 추진되는 나라의 일이 극단적인 수단만 동원하면 언제나 멈추게 된다는 점이 과연 좋은 선례가 될 것인지 묻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이고 틀인지 의문이 간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시에 획득할 수 없을 때 소수보다 다수의 유익을 우선하는데 묘미가 있다. 개인이 어떤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상대의 굴복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바른 민주주의의 질서가 아닌 듯싶다.

‘천성산 고속전철 터널 공사를 위하여 환경영향 평가를 한다.’ 여기에 합의를 했기에 한 종교인이 극한의 투쟁을 멈추었다는 보도에 박수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뒤에 무수한 사람들은 박수보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필자도 박수를 보내는 데 주저하는 대열에 서있다. 국립해상공원에서 자란 필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한다. 자연환경의 보존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앞을 선다. 들꽃 하나라도 꺾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간섭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 종교인을 앞세운 투쟁과 그 결과에 대하여는 가벼운 동의를 펼치지 못한다. 결코 나와 다른 종교인이기에 나온 속 좁은 심성의 결과는 아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그들의 결단이나 행동을 함부로 말한 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강의실에서 말해 온 사람이다. 오직 우리 사회와 나라의 미래 때문에 하고 있는 말이다.

우리의 혈세를 부어 진행한 수많은 일들이 한 집단이나 개인의 마음대로 그 방향을 틀게 된다면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 대열에 서서 함께 피리를 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인 듯하다. 국민의 다수가 소외된 사회로 우리나라가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척 염려가 된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들이 계속 이어진다.
 

이미 네 차례나 실시되었던 천성산 터널 공사를 위한 환경조사는 모두 허구였던가? 그 조사팀은 모두 진실을 외면했던가? 앞으로 있을 공동으로 하게 될 환경조사의 결과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또 다시 극한 투쟁이 나올 것인가? 국민의 다수는 자신의 그 막대한 혈세를 낭비하면서도 소수의 의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의 정부는 위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는 못할지언정 해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는 기본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100일을 단식한 한 승려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말없이 허탈해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과 물질의 상처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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