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김철훈 목사 1905-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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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김철훈 목사 1905-1948
  • 윤영호
  • 승인 2005.01.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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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정책 반기들다가 순교
 

일제의 숱한 고문과 반복되는 구속 겪으며 고난   

반일투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김철훈목사는 일경의 꾸준한 감시를 받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속 수감돼 고문을 받은 애국목회자다. 그의 이같은 민족애적 신앙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김종덕목사의 철저한 신앙에서 비롯됐다.


3.1운동 당시 15세였던 그는 4년형을 언도받아 구속된 아버지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 나라의 독립과 신앙을 하나로 연결시켜 구국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김철훈목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숭실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데 이어 평양신학교에 입학, 목사로 나선다. 숭실학교 재학시절에는 광주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평양시 각 학교에 격문을 배포했다는 혐의를 받아 고문, 구속됐다고 한다. 모진 고문을 가했지만 그는 동료의 이름을 한 명도 말하지 않아 큰 피해는 없었다.


신학교 졸업 후 그는 숭실학교 교목에 청빙될 만큼 총명을 보였으며 이어 용강읍교회, 송산교회, 삼성리교회 등지에서 사역했다. 일제의 밀착감시 때문에 교회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기철목사와 함께 구속된 경험도 있다. 1939년 터진 농우회사건에 연루된 것인데,  농촌청년들을 규합해 반일교육을 했다는 혐의를 두고 일제가 의식있는 사역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 사건이다.


1942년에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필화사건으로 연루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해방후 평양 산정현교회를 맡은 김철훈목사는 공산당의 압박을 견디며 조만식장로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일원으로 비밀월남, 밀서를 이승만박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격동의 세월을 산 그는 결국 공산당의 하부조직에 편입하려는 공산당에 대항하다가 한국전쟁 1년전에 실종됐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교계는 순교한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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