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노영수 사관
상태바
교회사 속 인물 : 노영수 사관
  • 승인 2004.11.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세군 100년사 중 최초의 순교자

“나는 30년 간 구세군에서 예수의 십자가 밖에 전한 것이 없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대들에게 동조할 수 없다.” 노영수 사관은 진주까지 점령한 공산군을 피한 다른 교역자와 달리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발각, 회유하며 취조하는 공산군에게 이렇게 말하고 결국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죽기 직전 그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집으로 가라, 믿음을 지켜라, 하나님이 지켜 줄 것이다.”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의 이같은 순교일화는 구세군 100년사에서 최초로 일어난 순교로서 높이 추앙받고 있다. 이 사실은 영국 구세군만국본영 발간 ‘구세공보’와 ‘사관잡지’ ;‘구세군 100년사’ ‘극동의 구세군’등의 책자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기독교회사가 순교의 역사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일화인 것이다.

노영수 사관은 경북 의성군 출생으로 비록 가난 하지만 엄격한 유교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08년 그가 사는 지역에 구세군이 노매동군영(교회)을 세웠는데 당시 또래아이들의 지도자 노릇을 했던 노영수는 친구 7명을 중심으로, ‘7인동지’를 구성하며 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성경통신공부와 군영의 소년사업에 충실했고 영학생대회가 열린 대구에까지 걸어서 갈 만큼 열성적이었다. 결국 그는 결혼 직후 서울로 올라와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며 본격적으로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 건장한 체격과 굳건한 의지로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확장하는 등 사역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다가 다시 한국전쟁을 맞은 그는 조금의 동요없이 하던 사역을 그대로 했다고 전해진다. 불과 수십리 앞에 다가온 공산군에도 아랑곳없이 ‘최종말이 오며는’이란 제목으로 주일설교를 끝마칠 정도로 굳은 믿음의 소유자였다.

노영수 사관은 총살 직전 다른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요구하고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구세군기를 들고 “할렐루야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시오.”라고 외쳤다. 이후 영국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순교자의 피’를 제작했다. 그의 아들은 감리교 목사와 교수가 됐으며 순교현장에 있던 두 청년(김복권, 최광수)도 사관이 됐다고 한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