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특수교육은 1894년 설립된 평양맹아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는 기독교계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일반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개화기, 국운이 쇠해 일반 백성의 삶도 어려워진 때에 사회적으로 소외 받던 시각장애인을 위해 평양맹아학교 설립자 로제타 홀은 평양맹아학교를 설립하고 최초의 특수교육을 시작했다.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장애인에 대한 처우가 좋았다고 한다. 조세와 잡역 등이 면제됐고 구휼기관도 존재했다. 직업교육을 통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고 장애인이 고위 관리까지 올라간 사례도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무당이나 점쟁이 혹은 악공이 되는 것을 장려했고, 그마저도 조선 중기 사림이 득세하면서 유교가 교조화되면서 악공 외에는 마땅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나라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마비되기 시작한 개화기부터는 장애인에 대한 처우는 급속도로 나빠져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는 존재가 됐다.
조선의 개화기 선교사로 온 로제타 홀은 시각장애인 사역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당시 서양인 의사가 약을 만들기 위해 환자의 눈을 빼간다는 뜬소문이 있었기에 사역을 시작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1894년 봄 기독교인 오석형의 딸 ‘오봉래’에게 기초적인 점자를 가르치게 되면서 편견을 뚫고 본격적으로 특수교육에 뛰어들게 된다.
시각장애인 교육을 위해 로제타 홀은 한국어 점자를 제작했다. 로제타 홀은 오랜 기간 뉴욕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자원봉사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시각장애인 봉사 경험과 점자해독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을 찍어 점자를 고안해 오봉래를 교육했다.
오봉래를 가르치던 로제타 홀은 남편 윌리엄 홀이 순직하자 미국으로 귀국해 안식년을 가졌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다양한 점자들을 연구한 끝에 4점식 ‘뉴욕 포인트’가 한글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해 ‘평양점자’를 만들게 된다. 1898년 조선으로 복귀한 로제타 홀은 조선어 점자 교재와 점자 십계명 등을 제작했다.
평양맹아학교에서는 성경, 지리, 음악, 산수 등과 더불어 실용·기술 과목으로 뜨개질이나 마사지 등을 가르쳤다.
로제타 홀의 첫 제자였던 오봉래는 로제타 홀이 조선으로 돌아오자 다시 교육받았다. 성격이 온순하고 성실했으며 공부도 잘해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헬렌 켈러’라고 불렸으며 1년 만에 점자를 완벽하게 습득했고 평양맹아학교 1회 졸업생이 됐다. 오봉래는 1906년부터 평양맹아학교의 교생으로 재직하다가 1915년 동경맹학교에 유학해 사범과를 졸업했고 우리나라 특수교육에 헌신했다. 안타깝게도 오봉래는 1918년 유행성 열병으로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사망했다.
평양맹아학교는 시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함께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고 접촉할 기회를 얻어 평범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을 기본 철학으로 삼아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던 시각장애인들을 돌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