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감염병인 결핵, 그 결핵 퇴치를 위해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크리스마스 씰을 판매해 퇴치 기금을 마련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렸을 때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구입했던 경험은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판매한 것은 선교사다. 셔우드 홀이 1932년 결핵 치료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했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 판매였다.
크리스마스 씰의 최초 발행자 셔우드 홀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병원 해주구세요양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1928년 해주구세요양원이 세워질 당시 한반도 결핵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는 결핵 환자가 총 45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에 결핵이 나병이나 전쟁보다 무섭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해주구세요양원의 설립자 셔우드 홀은 선교사였던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의 아들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인해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셔우드 홀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의과대학 졸업 후 결핵 연구를 진행하다 1925년 조선으로 파송 받았다.
연구에 따르면 셔우드 홀은 1910년 무렵부터 결핵병원 설립을 꿈꿨다고 한다. 결핵병원 설립을 위해 자문을 구하고 다녔으며 X-ray 장비 구입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도착 후에는 2년 동안 감리교 선교부를 설득했다. 각고의 노력과 준비 끝에 1928년 해주구세요양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모금 활동에 열을 올렸고 다행히 건축할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다만 해주시장이 요양원 건설부지가 공원용부지라는 이유와 결핵 환자들이 모이면 결핵이 창궐할 것이라는 이유로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결국 최초의 부지에서 조금 더 산과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현대에는 의학의 발전으로 다양하고 효과적인 결핵치료법이 개발됐지만, 당시에는 좋은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것 외에는 다른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부지변경이 전화위복이 되어 오히려 최적의 환경에 요양원이 설립됐다.
해주구세요양원의 부지 총면적은 2만 5천 평이 넘었으며 총건평 825평의 요양원은 본관・여자관・예배당・오락실 등 모두 9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요양실은 1인 1실이었다.
당시 최신식 기구인 X-ray와, 인공기흉기, 전기치료기도 보유하고 있었으며 환자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시범농장도 존재했다.
해주구세요양원의 수입은 모두 환자의 치료와 요양원의 확장에 투자됐지만 무료 입원동을 운영해 돈이 없는 사람도 치료했다. 셔우드 홀은 부족한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씰 판매를 계획했던 것이다.
셔우드 홀은 추방당한 1940년까지 꾸준히 크리스마스 씰 판매와 결핵 환자 치료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