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인재양성 열망이 현대식 의학교육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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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인재양성 열망이 현대식 의학교육 확립
  • 김태현 수습기자
  • 승인 2024.02.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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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2) // 에비슨과 세브란스의 헌신(중)
올리버 에빈슨(좌)과 루이스 세브란스(우)
올리버 에빈슨(좌)과 루이스 세브란스(우)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의과대학) 설립은 단순히 현대식 병원이 생겼다는 의미 이상이다. 우리 민족의 의료체계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식 의료체계 확립에 기여한 두 명의 공로자는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과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다.

에비슨은 영국 출신 캐나다 의사로 1893년 조선에 선교사로 도착한다. 그는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해 토론토 의과대학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 출신이지만 배움에 힘써 의사와 교수가 됐다. 교육의 중요성을 알기에 조선인 의료인력을 배양해야만 선교사들이 없어도 의료체계가 무너지지 않고 기독교가 계속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해 조선인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려 힘썼고 직접 의학서적과 의학용어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듬해 안식년을 다녀온 사이에 애써 가르쳤던 학생들은 흩어졌고, 번역한 원고는 소실됐다. 

그럼에도 에비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교육여건을 개선해 학생들의 삶을 돌봤고 한국어 의학 교재를 편찬했다. 수업연한을 8년으로 조정하고 예과 과정을 신설하는 등 의학교육의 기틀을 잡았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제중원 의학교는 1908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 7명을 배출했다.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22년만이었다. 제중원 의학교는 ‘사립 세브란스 의학교’(1909년)와 ‘세브란스 연합의학교’(1913년)가 됐다. 에비슨은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직과 연희대학교의 전신 조선기독교대학의 교장을 동시에 맡으며 18년간 헌신했다.

또 한 명의 공로자인 세브란스는 록펠러와 함께 석유사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으로 말년에 자선사업에 헌신했다. 세브란스는 에비슨의 연설에 감동해 병원 설립에 2만 5000달러를 후원했다. 1907년 한국에 방문 후 시설 확장을 위해 3만 달러를 추가 지원해 총 5만 5000달러를 후원하며 현대식 병원 건립의 기초를 다졌다. 에비슨의 추진력도 중요했지만 세브란스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13년 6월 2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당시 세브란스는 자기 명의의 집 한 채 남겨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언장 없이 사망했으나 기부약정이 적힌 수첩이 발견돼 자녀들이 계속 아버지의 뜻을 이어갔다. 세브란스 기금에는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세브란스의 정신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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