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던 내 삶의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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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던 내 삶의 유일한 탈출구는 하나님이었습니다”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3.03.20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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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인사이더 (30) 찬양으로 복음 전하는 성악가 /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임승종 교수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수재…세계적인 성악가 대신 ‘찬양 사역자’ 택해
1천회 넘는 간증집회서 복음 전해…‘크리스천 뮤지션’ 양성에 힘 쏟아

여기,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에 장애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청소년기 줄곧 왕따를 당하며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던 한 소년이 있다. 반면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국내 명문대를 졸업한 뒤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권위 있는 다수의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까지 거머쥔 한 성악가가 있다.

소위 말하는 흙수저와 금수저 인생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인물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찬양하며 복음을 전해온 사명자이자 현재 백석예술대학교에서 실력과 영성을 겸비한 후학 양성에 힘 쏟고 있는 임승종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

평생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화려한 스펙 뒤에 가슴 아픈 유년시절을 간직한 임 교수는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았는데 여러분도 속는 셈 치고 예수 한번 믿어보라고 외친다. 그동안 수많은 집회에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 간극을 메운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해온 그에게서 역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킨 믿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임 교수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믿는 것이 진실된 찬양”이라고 말한다.

눈물겨운 믿음의 여정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제 인생의 첫 사역은 부모님의 자살을 포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무려 1,000회가 넘는 찬양 집회를 인도해온 임 교수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이 한마디로 대변했다.

연세대학교 성악과 수석 졸업 후 이탈리아의 조아치노 로시니 국립음악원서 수학, 빈첸초 벨리니 콩쿠르와 만토바 콩쿠르 수상까지. 임 교수를 수식하는 프로필에는 누구라도 입이 떡 벌어진다. 이런 그가 세상에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는 대신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노래해온 까닭은 한숨과 눈물로 얼룩졌던 삶이 구원받은 은혜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임 교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두 눈과 한쪽 청력을 잃은 상이용사로서 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원망했고 급기야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참한 현실로 인해 절망에 빠져 지내시던 아버지가 응애!’ 하며 태어난 제 울음소리를 듣고 어머니께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여보 이제 우리 정말 살아봅시다였다고 해요. 부모님이 새 삶을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얻은 것이죠. 돌아보면 주님께서 저를 통해 예비하신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진정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 교수가 네 살이던 무렵 아버지의 사업체가 부도를 맞으면서 목사님의 도움으로 교회에 온 가족이 피신하면서다. 거처라고 해봤자 마을회관에 세워진 교회 종탑 밑에 가마니를 깐 게 전부였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교회에 발을 들인 임 교수의 아버지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상황은 반전됐다. 교회의 도움을 받던 부친이 이제는 교회를 섬기는 신실한 종이 된 것.

당시 제가 살던 동네가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상이용사촌었어요. 팔다리 없는 상이용사 가족들의 마을이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 국가에서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철거를 명령했어요. 그때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마을회관의 교회를 도와준 게 도리어 아버지였습니다. 때마침 형편이 좀 나아져 이사했던 우리집 앞마당을 선뜻 예배당으로 내어준 거죠.”

전쟁 중 당한 부상으로 한때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임 교수의 부친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됐다. 교회를 핍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임 교수에게는 매일 아침 등교할 때마다 예수님 다녀오겠습니다란 인사를 시킬 만큼 철저한 신앙교육을 했다.

그러나 임 교수의 마음속에는 부친에 대한 미움과 상처 투성이었다. 아버지가 장애인이란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가난 때문에 구두닦이를 할 만큼 힘들었던 탓이다. 중학교 2학년 때는 극단적인 생각도 계획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실패했다.

하나님이 임 교수를 돌이키신 건 고등학생 때 참석한 수련회를 통해서다. 이 자리에서 방언의 은사를 선물받은 임 교수는 가슴 깊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길 죽을뻔한 너를 결국 나에게로 인도한 이는 바로 네 아버지라며 그런 네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그 순간 평생을 나는 왜 하필 저 남자의 아들로 태어나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원망하며 살아왔던 제 모습을 회개하고 밤새도록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현재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대전 현충원에 안장돼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신다고 말하는 임 교수는 아버지께서는 생전 이 애비는 해줄 게 없지만 기도하면 하늘의 아버지가 항상 너를 도와줄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고 회상했다.

제가 간증할 때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만약 우리 집이 부자였다면 오렌지족은 못 돼도 낑깡족은 됐을 것이란 거에요. 많은 물질로 영혼이 파괴돼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신 하나님과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늘나라의 찬양대원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살려 대학에 진학한 임 교수는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극동방송선교단 사운드 오브 글로리’(영광의 소리 선교단)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찬양사역의 비전을 품게 됐다.

하루는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지닌 서양 선교사 할머니께서 제게 오시더니 미스터 임. 찬양은 목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드리는 거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 말이 제 인생을 바꿨어요.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에요. 가사를 온전히 내 믿음의 고백으로 승화시킬 때,성령님이 내 안에 운행하시고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이후 하나님은 임 교수를 찬양사역자로 훈련시키는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동행하셨다.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을 때 특별히 하나님은 재정과 만남의 복을 허락하셨다.

이탈리아에 가기 직전, 저의 수중에는 퇴직금 130만원밖에 없었지만 전부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150만원을 채워주시더라고요.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 믿음을 보았으니 앞으로 모든 유학생활을 책임져주겠다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요.”

이 같은 약속은 풍성한 열매를 거뒀다. 먼저 세계 10대 테너 카를로 베르곤지의 눈에 띄어 아카데미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배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각종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전문 지휘자로 명성이 자자한 임원식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 덕분에 그는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뒤 곧바로 국내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데뷔해 오페라까지 친줄하는 등 승승장구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임 교수는 자신의 달란트를 세상이 아닌 오직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단한 만큼, 찬양사역자로서의 길을 올곧이 개척해나갔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출신인 아내 방희 권사는 큰 힘이 돼주었다. 임 교수 부부는 주님이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 순종해 달려간 결과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참석한 교회의 간증집회만 무려 1,000회가 넘는다.

이 자리에서 임 교수는 어렸을 적부터 만나온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간절히 복음을 전한다.

간증집회에서 저는 늘 희망이 없던 제 삶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오로지 하나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저는 무수한 연단과 훈련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지만, 때가 되어 일꾼으로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이었다는 걸 깨달은 이제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름으로써 예비된 더 큰 복을 누리길 간절히 바랍니다.”

임 교수는 이러한 간증들과 함께 성령님이 감동을 주실 때마다 적어둔 메모들을 한데 모아 <하늘 아버지와의 속삭임>이란 책으로 발간했다. 책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따라 살려는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울러 찬양테이프를 제작·발매, 수익금 전액을 하나님 통장으로 입금했다. 국내 미자립교회를 돕고, 필리핀·러시아·방글라데시아 등 해외에 교회를 세우는 선교비로 사용한 것이다. 이 밖에도 베트남·아프리카 등지 아이들과 결연을 맺어 기쁨으로 물질적 후원을 감당하고 있다.

만약 돈을 모아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했다면 정작 아무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부유함이 아닌 마음 속 감사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저 역시 돈이 많지 않아 어렵게 물질을 심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지난날 주의 일에 동참한 흔적들이 풍성하게 남았습니다.”

백석예술대학교에서 만난 임승종 교수.
백석예술대학교에서 만난 임승종 교수.

한편, 임 교수는 2008년부터 백석예술대학교에서 음악학부 전임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처럼 찬양사역자를 꿈꾸거나 CCM 가수 등 크리스천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음악적 기량을 전수함은 물론 신앙적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야말로 스승과 멘토로서의 12역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믿는 것이 진실된 찬양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찬양사역을 하고 CCM가수가 된다면? 그건 그저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찬양이 아닌 잔재주일 뿐이죠. 주님의 일을 하는 자는 그 속을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야 해요. 다시 말해 내 영혼부터 선교해야 한다는 뜻이죠. 저는 우리 학생들이 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본질을 잃지 않는 크리스천 뮤지션들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바람을 토대로 임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도 활짝 개방해 언제든지 학생들이 편히 찾아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껏 만난 하나님을 전하며, 여전히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있다.

제 인생의 목표는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믿음의 자녀로 세우고,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대물림하는 것은 저의 사명입니다. 한평생 동행해온 하나님께로 이 모든 사람들을 안내하는 것, 그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임 교수가 극동방송선교단 ‘사운드 오브 글로리’에서 활동하던 모습.
임 교수가 극동방송선교단 ‘사운드 오브 글로리’에서 활동하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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