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이태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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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이태석목사
  • 승인 2004.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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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리 야구장서 총살처형

이태석목사는 성결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당시 우리나라에 새로 소개된 하나님의교회에 가입해 목사안수를 받아 사역했던 인물로, 성결교의 태동주역임과 동시에 하나님의교회 초대회원으로 기록돼 있다. 이태석목사는 1933년 4월 박현명 목사를 총회장으로 추대한 성결교 제1차 총회 당시 목회를 시작, 성결교가 교단으로 면모를 갖출 때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일본으로 유학까지 하면서 얻은 신학교육에 대한 열정은, 하지만 1936년 일어난 교단분쟁을 계기로 교단탈퇴를 결심하게 만든다. 성결교 교단지인 ‘활천’의 초대편집을 맡은 그였지만 교회의 내부적인 갈등을 견디기에는 자신의 신앙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성결교(당시에는 경성성서학원이 신학교였음)로부터 이탈한 일부 목회자들과 함께 1935년 일본에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소개한 송태용목사를 만나 한국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교단으로 성장시켜 갈등없는 교회개척을 꿈꾸었다.

그는 이후 하나님의교회에서 안수를 받아 평양 상수리교회를 담임했다. 당시 맞은 8.15는 그에게 더 큰 사역의 비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지만 6.25발발이 그 지상인생의 끝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본에 유학한 일도 있었지만,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에 학생신분으로 적극 참여, 줄 곧 일제의 감시를 받아왔었다. 해방이후 늘어난 좌익계에 맞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침한 공산당은 전시체제에서는 그 어떤 종교집회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지, 교회폐쇄를 단행했다.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교단을 탈퇴했던 그였기에, 그리고 만세시위를 불사하며 복음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같은 공상당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이태석목사는 공산군에 끌려가 평촌리야구장에서 총살 당하고 말았다. 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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