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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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테러
  • 승인 2004.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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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영민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김선일씨의 죽음을 계기로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던 테러가 현실이 됐다. 선박·항공기 테러 등 지속적 위협이 국제화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테러는 파병문제와 연결돼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파병 반대나 찬성의 논리에 묻혀 테러에 대한 대응 방안이 제대로 강구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테러는 파병과 무관하게 언제라도 일어 날 수 있으며, 우리 사회도 이미 수차례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선 테러는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회·정치·종교 등 다양한 방면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폭력에 의존해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둘째, 테러리스트들도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철학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오래된 사상을 사용한다. 셋째, 미국과 그 동맹국에 대항해 테러를 행한다.

테러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도 일치돼 있지 않다. 첫째, 평화론(pacifism)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테러범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자는 입장이다. 물론 기독교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는 범죄자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사랑한 예가 많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는 범죄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롬 13:4에 보면 ‘국가의 관원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라고 했다. 성경은 범죄에 대해 개인의 복수를 금하고 있으나, 국가는 범죄에 합당한 보응을 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국가가 범죄자를 용서한다면 개인은 그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다.

둘째, 모든 아랍과 회교권에 반격하라는 과격한 논리도 있다. 회교 신자가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고 과격한 논리요, 비현실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셋째, 테러는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심판론도 있다. 고로 회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영적 측면과 국가적 대응의 측면은 서로 다른 영역이므로 한가지 면만을 말한다는 약점이 있다. 넷째, 아무 대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대응론이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속성은 대응이 없는 경우에 테러의 강도를 더해가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면 온 세상은 테러 만능의 세상이 될 것이다.

테러에 대한 합당한 대응은 국제 범죄에 대항하는 국가의 능력이다. 테러는 국가 안에서의 범죄가 아니라 국가 밖에서 자국민을 해치는 범죄이기 때문에 파상적 전쟁, 비정규적 전쟁, 소형 전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 내의 사법부가 대응할 수도 없고, 외교통상부도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테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러므로 국가는 테러에 대항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테러의 원인, 테러범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전담 정보기관을 육성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테러에 대해서 단 한번도 굴복하지 않고 정당한 응징을 가한 것은 정확한 정보력과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 때문이다. 우리도 국민 전체의 신뢰가 실린 테러 전담 정보기관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테러범을 응징할 수 있는 고도로 훈련된 특수부대를 육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테러범을 정확히 파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부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면서 또한 한국민으로서 테러범이 함부로 협박할 수 없는 나라의 국민이 되고 싶다. 테러가 무서워서 대로로 다니지 못하고 소로로 다녔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고 싶지 않은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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