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 오두막엔 ‘기도 흔적’… 건축사·교육적 가치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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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 오두막엔 ‘기도 흔적’… 건축사·교육적 가치 풍성
  • 김맹진 교수
  • 승인 2020.12.02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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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 호남기독교 선교유적지를 가다 ①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의 보존 가치
(아래 왼쪽) 인휴 선교사의 집. 원래 억새로 덮은 지붕인데 내려앉을 우려가 있어 녹색 천만으로 덮어두었다. (아래 오른쪽) 도성래의 집. 노르웨이 건축양식의 집으로 경사진 곳에 기둥을 세워 지었다. 밑바닥이 공중에 들려있다.  (위) 지리산 왕시루봉 교회에서 인요한 박사와 그의 순천 친구들이 주일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해발 1220m에 위치한 이 교회는 6.25 이후 군산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퀀셋 막사를 옮겨다 사용하고 있다.
(아래 왼쪽) 인휴 선교사의 집. 원래 억새로 덮은 지붕인데 내려앉을 우려가 있어 녹색 천만으로 덮어두었다.
(아래 오른쪽) 도성래의 집. 노르웨이 건축양식의 집으로 경사진 곳에 기둥을 세워 지었다. 밑바닥이 공중에 들려있다. (위) 지리산 왕시루봉 교회에서 인요한 박사와 그의 순천 친구들이 주일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해발 1220m에 위치한 이 교회는 6.25 이후 군산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퀀셋 막사를 옮겨다 사용하고 있다.

남녘 구례군 토지면에서 지리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11월초의 아침 공기와 햇살이 상쾌했다. 활짝 핀 구절초와 용담꽃, 붉은 청미래 열매도 초행자를 반겨주는 듯했다. 등에 진 짐 때문에 발길을 멈추고 쉬기를 서너 번, 땀을 닦고 앉아서 바라보는 섬진강 건너 광양 백운산으로 뻗어내려 간 산맥은 첩첩이 수묵화 한 편이다.  

산행에 배낭이 아닌 짐을 멘 것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산속 오두막의 난로를 수리하는 데 쓸 연통을 지고 가는 일이 내게 맡겨진 임무였다. 긴 연통 속에 온갖 공구와 짐을 구겨 넣어 무게 중심이 맞지 않으니 걸음을 뗄 때마다 기우뚱거렸다. 일행 6명 중 누구 하나 짐이 가벼운 사람이 없다. 너끈히 20kg은 되는 짐들을 나누어 메고 산을 오른다. 

오늘의 산행 대장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John Linton) 박사다. 잘 알려진 대로 인 박사의 아버지는 순천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던 인휴(Hugh Linton) 선교사다.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교를 설립한 인돈(William Linton) 선교사는 그의 할아버지다. 목포와 광주, 순천지역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 스테이션을 설치하여 복음의 씨앗을 뿌린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는 그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4대에 걸쳐 이 땅에 교육과 의료를 포함한 선교사역을 펼쳐온 선교 명문가문이다. 

두어 시간쯤 오르니 잣나무 숲이 나타났다. 인 박사의 아버지가 서울대학교와 함께 조성한 조림지라고 한다. 조금 더 오르니 ‘서울대학교 남부학술림’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헬기장을 지나 노송 한그루를 왼편에 끼고 좁은 길로 들어서자 낡은 반원형 퀀셋(quonset) 막사가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면에 흰 돌로 새긴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고 작은 강대상이 서있다. 연로한 목사님 한 분이 관리를 맡고 있으나 정기적인 예배는 드리지 않는 교회였다.
교회를 지나 오른편 언덕을 오르니 이국적인 형태의 오두막집이 여기저기 보인다. 숲속에 이런 집들이 있다니. 놀라움도 잠시, 가까이 가보니 벌어진 벽 사이로 먼지 쌓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드러난 기둥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했다. 왕시루봉에는 선교사들이 지어놓은 교회와 오두막집, 창고 등 12채의 시설이 스러지기 직전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개화기 우리나라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 중에는 전염병과 풍토병으로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희생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질병을 피하고 선교사역에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1920년대 초반 지리산 노고단에 쉼터를 조성했다. 그곳에서 레이놀즈(William Raynolds) 등의 선교사들은 양반을 위해 번역되었던 한문 구약성경을 상민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했다. 천민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보는 듯하다. 더욱이 띄어쓰기와 같은 한글 맞춤법의 근간이 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는 것은 국어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선교사들은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그들이 개설한 기독교 학교의 문을 닫고 1940년 일제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노고단의 쉼터는 방치되었고 여순사건과 6.25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었다. 광복 후 다시 돌아온 선교사들은 노고단의 시설물을 쓸 수 없게 되자 1961년부터 왕시루봉에 새로운 터를 닦았다. 

인 박사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큰 체구를 구부렸다가 엎드렸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두막의 벽난로를 수리했다. “삼수야, 중복아, 중수야” 쉴 새 없이 그의 어릴 적 순천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이곳저곳 낡은 곳을 손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이 오두막에서 지냈던 추억을 끄집어내며 왕시루봉 선교유적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그의 속내를 내보였다. 

“아버지는 이곳에 오시면 말씀이 없으셨어요. 늘 타자기 앞에서 편지를 쓰셨지요. 미국 교회에 한국 선교를 위한 지원 요청이었습니다. 이곳 왕시루봉 시설을 그동안 저 혼자 관리해왔습니다. 속히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9세기말 개항과 함께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도 외에도 교육과 의료활동을 통해 우리 국민들을 깨우치고 구제하는 데 힘썼다. 본국에서의 순탄한 삶을 마다하고 멀고 먼 나라에 와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그들이 우리 국민들의 자각과 복지, 산업화 등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왕시루봉 선교유적을 단지 종교적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좁은 해석이다. 역사적, 교육적, 문화적, 건축학적, 관광학적 측면의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행은 교회로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하나님, 130년 전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무지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느라 목숨을 바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기억하시옵소서. 왕시루봉에 선교사들이 남긴 소중한 유적이 사라질 지경에 놓여있습니다. 이곳을 보존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합심 협력하게 하시고, 이곳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성스러운 장소로써, 우리 역사와 근대문화를 이해하는 배움의 장소로써 길이 사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김맹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관광학부
김맹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관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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