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의료, 대북지원까지 한민족 사랑에 푹 빠진 ‘린튼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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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의료, 대북지원까지 한민족 사랑에 푹 빠진 ‘린튼 일가’
  • 김맹진 교수
  • 승인 2020.12.15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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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 선교사부터 4대에 걸쳐 한국에 복음과 사랑 전해
교회와 학교, 병원까지…한국 사랑 흔적 순천에 고스란히
조지와츠기념관은 순천 선교스테이션 조성과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크게 후원한 미국인 조지와츠의 선행을 기리기 위한 건물이다.
조지와츠기념관은 순천 선교스테이션 조성과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크게 후원한 미국인 조지와츠의 선행을 기리기 위한 건물이다.

<순천>
순천(順天)은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곳이었나 보다. 순천 스테이션은 호남에 설치된 미국 남장로교 선교 스테이션 5곳 중 가장 늦은 1913년에 설치되었다. 남장로교는 순천을 바탕으로 전남 동부지역과 경남의 하동, 남해지역까지 선교영역을 확대해나갔다.  

순천 스테이션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설치되었으나 26,000평 규모의 부지에 선교사 사택, 순천중앙교회, 유치원, 남녀학교(매산중고교·매산여고), 알렉산더병원, 순천성경학원 등이 들어선 대규모 선교 복합타운이었다. 이러한 선교시설을 조성하는 데는 프레스톤(John Preston) 선교사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1911년 미국 방문 중 순회보고회에서 기업인 와츠(George Watts)를 알게 되어 순천 스테이션 건립에 필요한 건설비와 운영비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순천의 선교유적 중 눈에 가장 잘 띄는 건물은 조지와츠 기념관이다. 1928년 ‘와츠기념성경학원’으로 건축되었으나 현재 1층은 순천기독진료소로, 2층은 선교사들의 유품과 사진을 전시하는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의 기독진료소는 순천지역 선교에 헌신한 인휴(Hugh Linton)·인애자(Lois Linton) 선교사 부부가 결핵 환자들을 위해 운영한 병원으로 지금도 진료 중이다. 이 부부는 이후 무의탁 결핵환자들을 위한 요양원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설립했다.

조지와츠 기념관을 따라 올라가면 매산중고등학교와 매산여자고등학교로 이어진다. 매산중학교의 매산관은 1930년에 지어진 ‘와츠기념남학교’로 2층 석조건물이다. 매산여고 안에는 프레스톤 선교사의 사택이 보인다. 1913년에 지어진 2층 석조건물로 지금은 이 학교의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또 한 채의 선교사 사택은 1913년에 지어진 매산학교 교장이었던 선교사 코잇(Robert Coit)이 생활했던 곳이다.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순천에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농어촌 선교에 전념했던 인휴 선교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매곡동을 오르는 길옆에는 그가 농어촌 비포장 길에 타고 다녔던 것과 같은 모델의 랜드로버 자동차가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매곡동 언덕에는 2012년에 개관한 순천시립 기독교역사박물관이 있어 이 지역 기독교 전래 역사와 유물을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프레스톤 가옥은 순천 선교스테이션의 개척에 크게 기여한 프레스톤 선교사가 살던 사택이다. 매산여고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다.
프레스톤 가옥은 순천 선교스테이션의 개척에 크게 기여한 프레스톤 선교사가 살던 사택이다. 매산여고 어학실로 사용되고 있다.

순천과 여수는 서로 맞닿은 지역이다. 여수공항 건너편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는 1926년 광주에서 이전한 나환자치료 전문병원 애양원과 애양교회, 애양원 역사박물관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광주의 나환자병원은 1909년 급성폐렴에 걸린 오웬 선교사의 치료를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오던 의사 포사이드(Wiley Forsythe) 선교사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병환자 여인을 자신이 타고 오던 말 위에 싣고 오는 바람에 생긴 병원이었다. 오웬은 숨졌지만 대신 광주에 나병환자 치료를 위한 전문병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병환자가 몰려들자 주민들의 이전 요구가 드세어 병원은 여수 앞바다의 섬으로 옮겨졌다.     

애양원에는 여순사건 때 좌익세력에 의해 두 아들을 잃고 6.25 때는 교회를 지키려다 자신마저 공산당의 손에 목숨을 잃은 손양원 목사를 기리는 순교기념관이 있다. 두 아들과 함께 손 목사 부부가 안장된 삼부자묘역도 둘러볼 수 있다.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삼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였다.  

순천에는 선교유적 못지않게 유명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파란 눈의 멀쩡한 외국인이 전라도 사투리를 감칠맛 나게 늘어놓으며 자신을 ‘순천촌놈’이라고 말하는 사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John Linton) 박사다. 그의 아버지 인휴(Huhg Linton), 할아버지 인돈(William Linton), 진외증조부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까지 4대에 걸쳐 그 가문은 어떻게 한국의 선교와 봉사활동에 헌신하였을까? 

인요한의 진외증조부 유진 벨은 목포와 광주, 순천에 남장로교 선교 스테이션을 개척하는 데 헌신했던 호남선교의 아버지다. 인요한의 할머니 인사레(Charlotte Linton; 샬롯)는 목포에서 유진 벨의 딸로 태어났다. 유진 벨은 광주로 올라와 남학교(숭일)와 여학교(수피아)를 설립하고 근대식 병원 제중원과 나병치료 병원을 열어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전개하며 광주 선교스테이션을 탄탄히 발전시켰다. 이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와 광주 북문교회의 목사를 지냈다. 1925년 57세의 나이로 순직하여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샬롯은 미국에서 장로교 여자대학을 졸업한 후 1922년 당시 군산에서 사역 중이던 선교사 인돈과 결혼한다. 인돈은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수의 기업 GE에 입사가 예정돼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1912년 22세의 나이로 한국 선교에 나선 사람이었다. 인돈은 한국의 교육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의 교사로 시작하여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여학교의 교장을 지냈으며, 암 투병 중에도 1959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4년제 정규대학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아냈다.          

인요한 박사의 어머니 인애자 여사가 무의탁 결핵환자들을 위해 세운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인요한 박사의 어머니 인애자 여사가 무의탁 결핵환자들을 위해 세운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인돈은 철저한 기독교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1930년대 말 일제의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고 운영하던 학교마저 모두 폐쇄한 채 1940년 본국으로 추방당했다. 기독교 학교로서 설립목적과 존립근거를 훼손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광복이 되어 다시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전여고의 화장실을 옮긴 일이었다고 한다. 일본 신사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화장실을 설치해버린 것이다. 그는 치료를 위해 1960년 미국으로 돌아간 지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돈과 샬롯은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셋째와 막내아들은 미국에서 교육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에 나섰다. 셋째 아들 인휴는 6.25때 미 해군 장교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아내 인애자와 함께 순천에 정착하여 결핵환자 진료에 진력하는 한편 순천 인근 지방에 600여개의 교회를 열었다. 그는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고 다녔으며, 대합실에서 고구마를 사먹으며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1984년 교통사고로 숨져 순천시 조례동 결핵요양원 뒷동산에 묻혔다. 인돈의 넷째 아들 인도아(Dwight Linton)는 광주에서 활동했으며, 호남신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은퇴 후에는 미국에서 북한돕기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인휴는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중 세 아들은 한국에 남아 봉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큰아들 인다윗(David Linton)은 해외선교에 열중이고, 둘째 인세반(Stephen Linton)과 막내아들 인요한은 1995년 유진 벨의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진벨재단’을 만들어 북한 결핵환자 치료와 의료지원 활동에 힘쓰고 있다. 두 형제가 결핵환자 진료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횟수는 지금까지 100여 차례가 넘는다.

인요한은 어린 시절 순천에서 자라 전라도가 고향임을 대놓고 자랑한다. 그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숨질 때 구급차가 없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형 앰블런스의 개발과 119응급체계 정립을 주도했다. 그는 1921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에 지었던 수양관을 초기 선교사들의 섬김을 본받는 교훈의 현장으로 쓰일 수 있도록 보존하는데 애쓰고 있다. 

유진 벨로부터 인요한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이 가문이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만 건국훈장 애족장, 국민훈장 목련장 등 3개나 된다. 호암상과 같은 사회봉사상까지 포함하면 그들이 받은 상은 더 많이 늘어난다. 그들의 헌신적인 한국 사랑을 국가사회가 인정하고 포상한 것이다. 125년간 변함없이 한국을 사랑한 가문. 그들의 선교활동과 봉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맹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관광학부
김맹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관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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