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의용군으로 6.25 참전한 한기총 사무총장 정연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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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으로 6.25 참전한 한기총 사무총장 정연택 장로
  • 승인 2004.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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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하나님 만나 생명구한 열여섯살 소년의 기도 “다신 이 같은 비극이 없게 하소서”

일평생 평신도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사모한 일꾼 정연택장로(한기총 사무총장). 하나님이라고는 알지도 못한 한 어린 소년이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았다. 매년 6월이면 아픔과 감사가 교차한다는 그는 6.25전쟁이라는 난리 속에 하나님을 만난 행운아였다. ‘정연택’이라는 이름 석자를 걸고 쏟아낸 기도. 하나님은 그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사랑을 허락하셨다.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갚아야할 빚, 바로 그것이었다.

살인죄 누명쓰고 공산당에 잡혀가

1945년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의 기쁨을 맞본 것도 잠시, 나라는 신탁과 반탁이라는 두갈래 싸움을 시작했다. 강대국의 세력다툼으로 갈라진 이념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이 작은 땅덩이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 그것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소년 정연택이 살고 있던 전남의 한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비소탕 움직임이 한창이었고 영문도 모르는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나보다’. 일말의 기대도 잠시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일어난 전쟁은 또다시 마을에 한바탕 피바람을 몰고 왔다.

“전쟁이 시작되고 다시 공산당이 활개를 치면서 우리 마을에도 반동을 색출하는 움직임이 시작됐지요. 당시 소학교때 친구 한명이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공산당원에게 잡혀갔어요. 모진 고문을 받던 친구는 다른 친구들의 이름 7명을 줄줄이 대며 살려달라고 했죠. 그 이름에 저도 들어 있었어요. 저 역시 살인죄를 쓰고 끌려갔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열여섯. 사람을 죽였을리 만무했지만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모진 고문과 매질속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가기까지 사흘을 꼬박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교회 한번 나가본적 없고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도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라는 이름석자를 부르며 매달릴 뿐이었다.

“하나님, 저는 정연택입니다. 저는 정말 사람을 죽인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죽을 수 밖에 없다면 하나님 곁에 가게 해주시고 만약 저를 살려 주신다면 평생 바른 일만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어린 소년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일까. 그는 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을 얻었다.

8명의 청년이 새끼줄에 묶여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시간. 최고 책임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죄수들을 둘러봤다. 그가 소년 정연택 앞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몇이냐?” “열 여섯입니다.” “공부를 더하고 싶지 않냐.” 두려운 목소리로 소년은 입을 열었다. “더, 더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런 것일까. 그 남자는 소년을 풀어주라고 했다. 나머지 7명이 어디론가 끌려갔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총소리가 들렸다. 다시 바라본 하늘, 눈 앞이 노랗게 변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전능하신 존재를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소년에게 새 생명을 선물했다.

열여섯나이에 군인이 되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헛되이 쓸 수는 없는 일. 소년 정연택은 그 길로 국군을 찾아가 학도병에 지원했다. 중학교 3학년의 어린 소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의 비극을 직접 체험했다. 낙동강전투부터 지리산 빨치산 토벌까지 어린 소년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하나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가 다시 학생의 자리로 돌아가기까지 10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는 전장에 있었다.

“당시 전쟁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통신체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군끼리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고, 시체 옆에서 그냥 눈을 붙이기도 했죠. 전투를 끝내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 임산부가 아이를 업고 끌며 피난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에 아이를 대신 업고 내려왔죠. 그 일로 상사에게 전방부대에 다녀오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어린 소년의 눈에 보인 피난민의 모습은 너무 가엾고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피난을 떠나는 나라,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흘리는 나라, 그것이 6.25전쟁을 겪는 한반도의 모습이었다.

자유, 그 소중함을 깨닫다

정장로처럼 학도의용군으로 군에 자원입대한 어린 학생은 수만여명에 달한다. 일본에 가있던 유학생까지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고 계급도 군번도 없는 무명의 용사들은 그렇게 나라를 지켰다. 주로 후방전투를 맡았던 학도병들은 낙동강전투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정연택장로가 친미 보수우익성향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전쟁중에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면 군인들이 사기를 얻었고 5만2천여 미군이 한국전에서 전사해간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6.25참전기념 공원에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정장로는 그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다. 자신이 얻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희생과 상처를 남겼다. 1951년 4월, 이승만대통령은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소년 정연택 역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마을엔 6천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고향엔 절반만이 살아남아 있었고 가족을 애도하는 곡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면서 정장로는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전남대 재학 중에 집사직분을 받을 만큼 열심이었다. 그가 다니던 서린교회는 미국에서 구호물자를 받아 쓸만한 것은 팔고 그 돈으로 농촌교회를 세워 나갔다.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에는 과부들의 통곡과 기도소리가 높아갔다. 정장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도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불러왔고 민족을 위한 기도가 끊이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54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전쟁으로 갈라진 땅은 좀처럼 합쳐질줄 모른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몸서리치게 고통스럽다. 못 입고 못 먹던 시절에 대한 기억, 한 마을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 무고하게 죽어간 이웃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산봉오리에 쌓인 눈만 봐도 눈 속에서 전투하던 기억이 떠오르고 푹푹 찌는 폭염에는 물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그날이 기억난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 정장로는 6.25전쟁을 가장 비참하고 슬픈 전쟁으로 기억한다. 흑백을 가릴 여유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또는 ‘반동분자’로 몰려 죽어갔고 무지했던 가족들은 먹을거리 하나에 이념을 팔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사상과 이념의 갈등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단정한다. 북한과 교류하고 어려운 동포를 돕는 일은 그도 찬성하는 바이지만 사상을 옹호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쉽게 받아 들이는데는 단호히 반대한다.

북한, 변화와 반성이 먼저다

분명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고 그 날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이 먼저 변화되고 열린 후에야 통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학도의용군회를 조직해 이름모를 무명용사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6.25 참전용사로 인정받게 만든 정연택장로. 예장 통합 남전도연합회 회장으로 평신도 세계협 대표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되갚아 나간 어린 소년은 이제 칠순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405장 찬송을 펴들자 눈물을 글썽이는 정연택장로는 6월25일, 한국전쟁 54주년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이 민족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하시고,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구속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후대에 평화를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하시옵소서.”

이현주기자(lhj@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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