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가 부러운 보수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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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부러운 보수주의자!
  • 송태호 원장
  • 승인 2020.09.0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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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사 송태호의 건강한 삶 행복한 신앙-34

우리 의원을 주치의로 정해 놓고 다니는 환자들 중 몇몇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원장님은 왜 영양치료나 비만주사를 처방 안하시나요?’ 이럴 때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마치 큰 비밀이나 말해주듯이 말한다. “저는 보수주의 의사거든요!”자 이렇게 나는 지면을 통해 커밍 아웃을 해버렸다. 

나는 보수주의 의사다. 하지만 그냥 보수주의가 아니라 진보주의가 부러운 보수주의자이다. 내가 한달에 수십장 발행하는 3차 병원으로의 진료의뢰서에는 보존적(보수적) 치료로 호전이 없어 보낸다는 말이 대개 들어간다. 영어로는 conservative treatment라고 하는데 conservative는 영국 보수당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존적 치료라는 것은 이미 교과서 등에 의해 치료방법과 치료 효과가 입증되어 있고 다른 방법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며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조차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치료법을 말하며 작은 의미로는 좀 더 소극적인 치료라고도 할 수 있다. 매년 셀 수도 없을 만큼 새로운 치료법이 나오고 있지만 그런 치료법들 중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치료법은 극소수다. 그마저도 약 5년 이상의 혹독한 검증을 거쳐야만 비로소 교과서에 한 줄 실릴 수 있는 것이다.

폐렴 환자에 있어 처음에는 광범위한 먹는 경구항생제를 투여하는 것이 보존적 치료의 예이며 이로 충분치 않을 때에 비로소 혈관내 항생제 주사 등의 치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설과 인력이 충분치 못한 우리 의원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며 보존적 치료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하지만 나 같은 의사만 있다면 의학의 발전이 어찌 있었겠는가?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제너 박사는 우두(소의 천연두)의 농을 사람에게 주사해 무서운 천연두를 박멸시키는 획기적인 의학적 진보를 이루어 내었다. 이처럼 의학에 있어 진보란 기왕의 보수적 치료보다 쉬운 방법이거나, 치료 효과가 월등히 좋거나, 치료에 따르는 부작용이 적거나 혹은 치료비용이 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만이 의학적인 면에 있어서 진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제너 시대에야 시설과 장비 모든 면에서 열악했으므로 그야말로 재야에서 한 사람의 노력으로도 진보적인 치료방법이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이런 진보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과 장비, 환자들의 희생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한 것이다. 

현대의학에서 의학적 진보의 예를 들자면 복강경 수술이나 로봇수술이라 불리는 다빈치 수술을 들 수 있겠다. 이 수술법이 나오기 전 사람의 내부 장기를 수술 하기 위해서는 배를 갈라야 했다. 당연히 수술에 따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수술은 잘 되었는데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의사 중 누군가 배를 가르지 않고 배 속에 내시경을 넣고 그 내시경으로 조그만 수술기구를 넣어 수술을 시작했을 때에도 많은 의사들이 반신반의한 것이 사실이다. 일단 수술 부위를 정확히 볼 수 있을 지, 배를 가르지 않고 수술 하다가 예기하지 못한 출혈이 나게 되었을 때 효과적으로 지혈이 가능할 것인 지에 대한 연구가 거듭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술기구의 발전이 따르자 비로소 복강경 수술은 담석이나 자궁 등의 수술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시행하는 수술법이 되었다. 

이 새로운 치료방법은 이런 과정을 거쳐 보수적인 치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즉 수 많은 진보적 치료중에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보존적(보수적)인 치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 같은 동네의사는 환자에게 철저히 보존적 치료만을 시행하는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 옳다. 

수 많은 검증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에 진보의 길은 어렵다. 하지만 요즈음 의료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너도 나도 진보라는 탈을 쓰고 효과가 증명되지 않은 설익은 발언들을 해대고 있다. 결국 어줍잖은 진보라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게 되겠지만 그 동안의 피해는 우리 모두가 나누게 된다. 당장 나에게 영향이 없다고 이런 설익은 소리를 나 몰라라 하게 되면 언젠가는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두 눈 부릅뜨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진보가 부럽다. 나는 제대로 된 진보가 부러운 보수주의자이다. 

송내과 원장·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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