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특강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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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특강 유감
  • 노경실 작가
  • 승인 2020.08.1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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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106

골로새서 2: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우한 바이러스 사태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전국의 크고 작은 도서관, 학교, 그리고 기업체나 각종 문화센타 등등에서 쉼 없이 수많은 강의와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주제는 마치 도서관 십진분류법에 속해 있는 세상 모든 지식과 활동분야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도서관은 세계 최고수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강연과 강의 중에서 단연 으뜸인 주제는 ‘인문학’이다. 이 분야의 프로그램은 초중고와 대학, 국립도서관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극히 작은 도서관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1년 12달 내내 이루어진다. 나 역시 ‘어린이인문학여행 전 3권’시리즈와 탈무드관련 책을 내서 바이러스 사태 전까지는 말 그대로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했다. 물론 나는 석박사도 아니고, 대단한 지식인도 아니어서 나의 인문학 강연 수준은 조촐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나의 바탕은 기독교이기에 분명한 선(線)이 있다. 그뿐 아니라 기독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에 강연할 때의 표현방법과 전달방식에 있어서 여느 인문학강연자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나의 인문학 강연은 늘 아슬아슬하다. 예수님이나 십자가라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하든 진정한 지식과 지혜는 인문학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소개해주고 싶어서이다. 조금이라도 직접적으로 기독교이야기를 내세우면 당장 공격이 들어오는 시절이 아닌가. 

그런데... 몇 주 전, A라는 지인으로부터 참으로 마음 아픈 이야기들 들었다. 어느 신학대학에서 인문학강연프로그램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초청강사 중 한 사람은 최고 인기소설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의아해했다. 나도 알고 있는 그 소설가는 불신자이다. 그런 사람이 신학대학에 와서 인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무엇을 전해주었을까? A씨가 말했다.

“그 날 너무 좋았지요. 그 소설가 분이 우리는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강연을 했는데 결론은 우리는 될 수 없다고 말했지요. 그만큼 우리가 악하고, 약하다는 말이지요. 그 날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였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학생들 대부분이 큰 감동을 받은 것 같았어요.” A씨는 몇 년 전의 일인데도 참으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 소설가는 신학생들보고 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입니까? 인문학애서는 해답을 못 찾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왜 감동을 받은 거지요? 인간은 선한 이웃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서요? 예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은 기억하기는커녕 읽지도, 듣지도 않는 신학생들이고, 교수들입니까?’ 나는 화마저 났다. 스타 작가라는 명망성의 포장에 현혹되어 그가 하는 말을 말씀보다 더 쑥쑥 빨아들이는 청년들도, 교수들도 안타까웠다. 인문학은 인간을 주인으로 설정하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해석과 결론은 당연히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다. ‘선한 이웃’ 문제만 놓고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6-37) 특히 ‘너도 이와 같이하라’는 ”Go and do likewise.”로써 지금 당장 하라는 명령이시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근거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10:27)”고 말씀하셨다. 초등학생이라도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알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런 예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성경은 이렇게도 명확히 우리에게 알려주는데도 우리들은 못 보고 못 듣는 게 아니라,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는 것은 아닌지! 성경에 인문학을 아우르고 넘어서는 해답이 다 있는데도, 교회나 신학교는 무엇이 부족한지 계속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공부하는 것과 그것을 따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저 인문학이라는 허울로 위장, 변장한 가치관과 철학에 감동하고, 쉬이 넘어가는 것은 청년들뿐이 아니다. 교회의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과 심리학, 성격이나 감정유형분석이다 하며 온갖 그럴싸한 것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나는 선데이크리스챤인 친구에게서 이런 말도 들었다. “경실아, 내가 아는 성격감정 연구하는 교수한테 목사들이 얼마나 많이 배우러 오는 줄 알아?” “목사들이 왜 그런 걸 배운대?” “교인들한테 가르칠 게 없어서 그렇대. 그리고 그런 걸 배워야 교인들이 늘어난대” -이것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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