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이종덕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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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이종덕목사
  • 승인 2004.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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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기독교에서 침례교회로 이름과 체제를 바꾼 지도자

침례교회 교단을 굳건히 세운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인 이종덕목사는 북한의 원산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하던 카나다 출신의 펜윅 선교사와 동역하며 동아기독교시대를 이끈 지도자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결사반대하며 옥고를 치루었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만주로 망명, 8.15해방을 타향에서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종덕목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탈출을 모색하며 한둘씩 떠날 때 “주여! 종이 이 수난에 맞서 산하 교회와 교단의 책임을 맡기셨사오니 죽음으로써 이를 지키며 직분을 감당할 용기도 믿음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총회를 지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종덕목사는 서울수복이 있던 9월28일을 보면서 포로들을 끌고 도주했던 공산군에 의해 금강 백사장에서 총살을 당했다.

1884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이종덕목사는 24살 때인 1907년 전도됐다. 하지만 나라의 현실이 암울했던 시대인 만큼 그는 1910년 빼앗긴 나라에 대한 설움을 품에 안고 돌아다니다가 원산에 머물렀다고 한다. 펜윅 선교사를 만난 때가 바로 이 곳이었다.

청년 이종덕은 6개월 간 펜윅으로부터 직접 성경공부를 지도받았다. 대한기독교회를 구성한 펜윅 선교사는 규모가 커지자 ‘동아기독교’라고 호칭을 바꾸고 이종덕에게 교사직분을 주어 전국에 다니며 사역하도록 했다. 그가 세운 교회도 부지수라고 전해진다.

이 같은 사실이 기록되면서 이종덕은 신앙과 성품을 인정받아 1912년 10월 경북 산점교회에서 모인 대회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된다. 그는 만주지역 선교에 열심을 품어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도 했으며 1921년에는 간도에 성경학원을 설립했다. 그의 열심히 이종덕목사는 동아기독교 제2대 감독으로 봉사하는 영광을 안았다. 드디어 지도자가 된 것인데 하지만 이종덕 목사는 1924년 감독직을 사임하고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강연회를 가졌다.

신사참배 반대등 일제의 압박에 항거한 그는 사역에 열심을 품은 만주지역으로 망명,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이종덕목사는 감독제도를 회중정치제도로 바꾸는 한편 동아기독교의 체제를 대폭 수정했다. 총회장에 추대된 이종덕목사는 강경에 공등성경학원을 개설했다. 그는 침례교와 유사한 점이 많은 점을 깨닫고 동아기독교를 침례교로 이름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9년 제39차 총회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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