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최종합격’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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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최종합격’ 했나요?
  • 노경실 작가
  • 승인 2020.02.11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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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열왕기하20:11-12>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나는 집에서 온종일 글을 쓸 때에는 자주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활짝 열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풍경을 바라본다. 아파트 단지 안의 오고가는 사람들, 길고양이들, 까치와 참새(맵새?)들과의 전쟁 그리고 은행나무와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기지개를 키게 되면 다음 작업을 활력있게 해준다. 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유로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쪽으로 계속 달리면 서울이고, 다른 쪽으로 달리면 북쪽이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들이 북한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상을 한다. 북쪽으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만약 개성, 평양, 신의주...북경과 모스크바를 달리는 날도 머지 않겠구나.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즐거움이 사라졌다. 미세먼지, 황사, 이제는 우한 바이러스까지! 사람들이 출근하는 일 외에는 도통 외출을 하지 않는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저녁에도 출퇴근하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적막한 도시, 침울한 거리, 마스크를 쓴 채 종종 걸움을 하는 두려운 눈빛의 사람들. 공포영화가 이런 게 아닐까. 거기다가 교회마저 적막강산이 되어가는 판에 난데없는 마스크논쟁까지 이어진다, 어느 목회자는 예배시간에 마스크를 써도 된다 하고, 어느 분은 믿음 있으면 쓰지 말라고 하고. 십자가는 사라지고 마스크가 우리의 생명을 약속해주는 형국이다.

이렇게 우울한 시간을 지나는 때에 우리 집에 잠시 웃을 일이 생겼다. 여동생의 딸, 그러니까 여자 조카가 중등임용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졸업 뒤, 처음 치른 시험에 합격한 것이라 그 기쁨이 더 했다. 조카는 합격통지서가 나온 교육청 홈페이지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내게 보내주었다. 그 화면에는 1차, 2차, 면접들의 점수, 합계 등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최종합격’이라는 짙은 청색의 글자였다. 그 통지서에 어떤 숫자와 평가가 있든 ‘최종합격’이라는 4단어가 없으면 그 순간 슬픔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생각해보았다. 어른이라는 우리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최종합격의 관문을 통과했을까? 아기가 온전하게 엄마의 몸에서 나오는 것도 일단은 출생의 최종합격이다. 10개월 아니 20개월을 품고 있어도 출산되지 않으면 그 생명은 세상입문의 최종합격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완성은 아니다. 출생이후, 갖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어린이집 입학부터.... 군대제대, 취업, 그리고 결혼... 그래서 합격하면 웃고, 불합격이면 운다. 평생 최종합격만 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합격했다가 불합격하고 불합격했다가 다시 합격하면서 삶은 늘 긴장 속에 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긴장은 합격일 때 웃음소리와 함께 느슨해진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때에” 영혼과 마음의 태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최종합격”이라는 도장을 꽝! 하고 받을 수 있다. 지상에서의 삶은 최종합격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최종합격의 판단을 받을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모으듯이. 몇 년을 살든 마지막 남은 합격, 참 잘했어요 스티커는 하나님이 붙여주실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슬픈 상황이든 벅찬 기쁨의 순간이든 ‘바로 그때에, At that time’ 우리는 정신차려야 한다. 

열왕기하 20장 11절에서 히스기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증거를 두 눈으로 보며 기적을 체험한다. 그리고 생명을 약속받는다. 이 정도면 인생최종합격 아닌가? 그러나 곧바로 12절의 첫 문장이 이렇게 이어진다. ‘바로 그때에’. 몇 장 뒤의 일도 아니고,  몇 구절 지난 뒤도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12절에서 히스기야는 ‘확실하게’ 실패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온 성도들이 다 알 정도로 기쁜 일이 생기면, ‘바로 그때에’ 인생이자 신앙여정 최종합격된 것 마냥 까불지는 않는지? 또는 응답받지 못했다고 슬퍼하며 문제에서 허덕인 채 있게 되는 상황이면 ‘바로 그때에’ 나는 인생도 신앙도 다 불합격자라고 스스로를 최종불합격자 라고 판단내리고 아예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최종합격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최종합격 판단 이전에 이 땅에서의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쌓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가 커다란 창고에 재물을 쌓아도 기쁨이 넘친다는데, 우리는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최종합격을 위해 누추한 믿음의 눈물이라도, 세상사람 보기에 초라한 소망이라도, 누더기처럼 이어지는 인내와 주님이 시켜서 할 수 없이 억지로 해낸 용서와 사랑이라도, 투덜투덜 눈치보며 해내는 섬김이라도 하루하루 쌓아가자. 어느 날, ‘바로 그때에’ 주님은 우리를 보고 일어서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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