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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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1)
  • 승인 2004.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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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화 현상으로서의 부흥운동’ 그 해석의 논지

그동안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학계 일각으로부터 비평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예일대학교 조지 래드(George T. Ladd)교수였다. 친일파였던 조지 래드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던 1907년 여름 평양을 방문하여 부흥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이와 같은 영적각성이 한국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 혹평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경배교수와 이만열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에 의해 초기한국교회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 작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이들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비정치화 내지 몰 역사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왔다.

이들의 논지의 핵심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당시 정치적인 소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 그 분출구를 찾으려는 현상이 나타나, 정치적인 소망이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되면서 부흥운동이 발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은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나 독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민경배교수는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다루면서 ‘경건과 피안의 교회 신앙-비정치화의 신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을 비정치화로 규정한 것이다. 일제의 정치적 득세로 인해 야기된 좌절감이 온 백성을 지배하고 있을 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휩싸여 선교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의도적으로 부흥운동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좌절 속에 방황하는 한국이 찾아 갈 유일한 보루’였고, 자연히 교회로 대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결과 ‘교회의 정치적 성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소망이 끊기고, 미국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국제정세 속에서 선교사들은 교회의 정치화를 막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의 정치적인 절망을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를 받아들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현상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민교수의 비정치화 해석은 상당수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돼 왔다. 대표적인 것이 이만열교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멤버들이다. 이들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됐고, ‘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 증진’에도 기여했지만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교수도 ‘한국 기독교사 특강’에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비정치화 해석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 신자들이 회개하며 가슴을 치는 동안 선교사들 중에는 이를 한국 민족의 운명과 일제의 한국 강점과의 관계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이 운동에 관심이 쏠리게 됨으로써 한일합병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국내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은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 하는 역할도 하였다는 것이라는 점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비정치화라는 민교수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교수 역시 전체적인 톤이 민교수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이교수는 그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민교수보다도 더 강하게 부흥운동 자체를 ‘종교적 카타르시스’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흥운동 전반으로 확대한다.

유동식교수도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 1884~1992’에서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망국의 시련을 신앙부흥운동에서 찾았다는 유동식교수의 논지 역시 비정치화 해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덕주교수도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에서 ‘비정치화’로 풀어갔다. 부흥운동의 결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가 한층 심화’되었고, 기왕의 정교분리 원칙이 더욱 고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서는 몇 가지 공통적인 측면을 관찰할 수 있는데, 첫째, 한국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엽 강대국의 침략 정책으로 정치적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둘째, 이 같은 정치적 위기 앞에 그리스도인들 일각에서는 교회로 찾아들었고, 교회가 열국의 침략 앞에 민족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 주기를 고대하였으며, 자연히 정치적인 현상이 교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선교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고, 교회가 정치적인 내분에 개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넷째, 한국민족이 일본의 정치적 침략 앞에 무너져 내리며 정치적 소망을 상실하고, 믿었던 미국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자 한국인들 사이에 반미운동과 폭동이 일어날 움직임이 있어 정치적인 울분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려고 의도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용규교수 /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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