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용천은 ‘조선의 예루살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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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은 ‘조선의 예루살렘’이었다
  • 승인 2004.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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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 기독교 민족운동 중심

북한 용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발사고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평양북도 용천 땅은 평양과 함께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복음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현재까지 예장합동총회(총회장:임태득목사) 소속 용천노회(노회장:김명섭목사)가 있고, 예장통합총회(총회장:김순권목사) 소속 용천노회(노회장:김창근장로)가 각각 노회를 조직할 정도로 한국교회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북 서남부 압록강 어귀 삼각주에 있는 용천은 경의선 지선과 각종 선박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로 발달되어 해상 및 육상교통의 요지로 발전했으며 비교적 일찍 개화문명을 받아들여 경제적인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곳의 기독교는 장로교가 주요 세력을 구성하고 있으며 성결교와 천주교가 미력하나마 교회를 설립했다.

특히 용천의 장로교회는 짧은 시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여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1군 1노회라는 놀라운 성과를 나타냈으며 기타 교육, 사회, 민족운동의 각 분야에서 지도적 인물을 배출했다.

용천군내 최초의 교회인 동문밖교회와 신창교회가 1898년에 설립된 이후 1929년에 이르러 용천군내에만 34개 교회가 설립되어 용천군 교회들로만 노회를 조직할 조건이 형성될 정도였다. 평북노회로부터 분리하여 설립한 용천노회는 계속 부흥하여 1938년에 이르러 교회가 57개 처소, 교인 1만9천4백47명, 목사 30명, 장로 1백48명, 집사 6백36명이었다.

이처럼 용천군의 교회가 크게 부흥한 데는 무엇보다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열렬한 전도열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도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용천교회는 선구적 입장을 보였다. 거의 모든 교회가 사립학교를 병설하여 교인 자녀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선교사들의 도움없이 독자적인 노력으로 학교를 설립, 운영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교회, 학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독교 세력이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세력으로 발전하게 됐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강하게 반대한 세력이 교회였으며 그만큼 일제의 교회에 대한 탄압도 극심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명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복음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순교당해다.

이처럼 기독교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용천교회는 8.15해방 후 용천군에도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교회는 또 다른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직후 이기혁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민주당’이 결성되고 공산당의 주일선거에 반대하는 등 공산당정책에 교회가 반대하고 나서자 공산당은 농민, 노동자들을 앞세워 교회를 파괴하고 목회자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월남을 시작, 6.25사변으로 더 많은 교인들이 월남했다. 월남한 용천노회 출신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용천노회 재건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52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37회 총회에서 용천노회를 재조직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송영락기자(ysong@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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