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포도나무? 청포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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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포도나무? 청포도나무?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9.06.04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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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81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해도 “남의 말(특히 흉보는 말)” 하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비유하자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입술이 성령의 불로 깨끗해지는 역사가 없는 이상 우리는 쉼없이 혀로 살고, 혀로 죽는다. 말 그대로 ‘혀 때문에 날마다 부끄럽게 죽노라!’라는 처절한 설생설사(舌生舌死)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베드로전서 4:8. 새번역)라는 말씀 정도는 알고 있는 성도들이 지저분한 이야기마당을 사랑으로 마무리하기에 그나마 우리들의 교회가 조용히 세워지고 가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 ‘사랑’ 안에 지식이 있어야 한다. 옳고 그림의 구별, 가르침과 배움의 활동, 징계와 권고의 교육, 용납과 순종의 결론이 없다면 무조건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한 것들이 무시되거나 소홀해질 때에 사단이 역사하는 것은 물론 사악한 이단과 사이비들이 교회의 벽에 미세하게 구멍을 낼 수 있다. 이런한 조심성은 대단한 신앙 논쟁거리나 신학적 해석의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대화 속에서도,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서로의 교제 안에서도 권고와 치리와 용납과 순종은 무시되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석의 힘’이 있어야 한다. 

지난 주, 내가 정기적으로 드리고 있는 노숙인 자활자 예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예배 인도하는 사관님(구세군 관리 아래에 있는 쉼터라서 사관이라 부르는 목사님들이 설교를 한다.)의 이야기다. 

사관님: 배 * * 형제님. 지난 예배 때에 예수님을 한 나무에 비유한다고 했지요. 그 나무 이름이 무언지 기억나는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배 * * 형제의 얼굴이 새 빨개졌다. 서른 초반인 배 형제는 청소년처럼 순박하다. 그때, 배 형제 옆에 앉아 있는 형제가 작게 말했다. “참포도나무!” 배 형제는 그제야 지난 주 설교가 생각났는지 씨익 웃더니 작지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 형제: 청포도나무요!

아, 거의 5분 정도는 모두들 웃느라 예배가 진행되지 못했다.  

사관님: 청, 청포도? 하하하, 청포도가 아니라 참포도나무입니다. 

배 형제는 예배 뒤에, 다른 형제들로부터 장난스런 놀림을 받았다. 기가 푹 꺾인 배 형제. (노숙인들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자존심이 상처받는 것에 훨씬 예민하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남은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식사 자리에서 일부러 큰소리로 배 형제에게 성경을 펼쳐서 보여주며 말했다.

“참포도나무가 대단한 어떤 포도나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보세요. 여기 들포도나무라는 말도 있지요. 살구와 개살구, 참외와 개구리참외, 귤과 낑깡, 딸기와 뱀딸기, 이런 것들 알죠? 진짜, 참된 것을 말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청포도나무도 가짜 청포도나무가 아닌 진짜 청포도나무이면 참포도나무인 거지요. 예수님이 배 형제의 청포도라는 말을 듣고 너무너무 기뻐하셨을 것 같아요. 와, 우리 배 **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구나. 예수님은 사과나무로도, 복숭아나무로도, 그리고 배 형제 이름처럼 배나무로도 표현할 수 있지요. 참된 나무라면 말이에요.”

주위에서 식사를 하던 형제들이 ‘맞습니다! “정말 그렇네요!”라며 말하자, 배 형제는 머리를 긁으며 웃기까지 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이 배 형제에게 싱싱한 청포도 한 접시를 주며 “잘했어. 배**아, 맛있게 먹어라!” 라고 말해주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만 아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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