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로 주장되는 예수님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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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로 주장되는 예수님무덤
  • 승인 2004.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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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교회냐 정원무덤이냐 놓고 엇갈린 주장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관광객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처절하게 끌려 올라간 길이 두 곳이라는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성경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설명된 십자가의 길(비아돌로로사)이 어떻게 해서 두 곳으로 소개되고 있는가. 성지순례 관광객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두 곳으로 소개할 때까지 성경고고학자들은 과연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묻힌 곳으로 나오는 골고다(해골이란 뜻이며 영어로는 갈보리)언덕의 전통적인 장소는 현재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또는 부활교회(동방교회에서 부르는 호칭)라고 불리는 곳으로 기독교 제1성지이다. ‘동예루살렘’ ‘구시가지’라는 이름을 갖는 성묘교회는 예루살렘 성 서부언덕에 위치해 있다. 2개의 돔을 갖춘 형태로 지어졌으며, 관광객만도 매년 평균 70만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다.

이에 대해 새로 주장되는 골고다언덕은 예루살렘 성에서 다마스커스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를 주장하는 측은 현재 이 곳을 ‘정원무덤’(Garden Tomb)이라고 부르고 있다.

부활절 전후 기간을 포함해서 일년 내내 전세계 20억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받는 성지가 왜 논란을 빚게 됐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려면 이스라엘 초기의 복잡한 역사를 되짚어야 한다. 그리스도 승천 이래 30년 후 예루살렘 성(城)은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철저히 파괴됐다. 식민지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이 극에 달하면서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집중 공격한 사건이 벌어진 것.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AD 66년부터 가열된 이스라엘의 독립운동과 수차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AD 70년 경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대 예루살렘 성에 쳐들어가 수십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며 이스라엘이 전세계로 흩어지도록 정책을 편 것인데 이후로 이스라엘은 1948년 새로 나라를 창건할 때까지 근 2,000년간 나라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갖은 박해를 가하는 가운데 로마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알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방이름으로 바꾸었고 유대교, 기독교를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비너스 신전 등 이방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집중적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AD 313년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며, 새로운 전기를 열어갔는데 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 “골고다언덕의 정확한 위치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너스 신전 주변을 샅샅이 찾는 과정에서 십자가로 사용됐던 나무조각도 발견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콘스탄틴 황제는 335년 급기야 그 곳에 성묘교회를 세웠고, “성묘교회가 지구의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그후 성묘교회는 여러 전쟁을 거치며 수차례 파괴와 건립을 반복했으며, 현재있는 건물조형은, 11세기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어쨌든 헬레나 황후의 명령으로 재발견된 골고다언덕은, 성묘교회라는 건물을 통해 아무런 논쟁없이 전통적으로 성지로 여겨왔었다.

그러면 또 하나의 골고다로 주장되는 ‘정원무덤’은 어떤 배경을 갖고 있을까. 이 얘기는 19세기 후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3년 당시, 오토만제국을 격퇴하려고 이스라엘에 온 영국의 찰스 고든장군이 예루살렘 성 밖을 거닐다가 우연히 해골모양을 한 바위모습과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발견했다고 한다. 신기한 지형모습에 매력을 느낀 고든장군은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발굴작업을 명령했고, 예상을 뛰어넘는 수확을 얻기에 이른다. ‘거대한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뛰는 가슴을 주체못한 고든장군은 고고학학자들의 자문을 구하면서 빈 무덤의 구조가 성경의 서술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냈고, 급기야 그는 “골고다언덕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다는 게 성경의 기록”이라고 밝히고 “성묘교회보다는 정원무덤이 진짜 골고다언덕과 예수님 무덤이 있던 장소”라고 주장하게 됐다.

세계 기독교계는 성묘교회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정원무덤 발견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해마다 부활절 기간이 되면 대만원을 이루는 성묘교회는 물론이고, 정원무덤에서도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불어 등 각국 언어로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이 정원무덤은 영국에 본부를 둔 한 단체가 깨끗하게 관리하며 성지로서의 가치보존에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성묘교회를 지지측은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경계는 수차례 전쟁을 통해 계속 심하게 바뀌었다”면서 “1538년 오스만 제국의 술래이만 황제가 현재의 예루살렘 성, 즉 사방 1km의 약간 기울어진 정사각형 모양의 성을 건설하면서 성묘교회를 예루살렘 성 내부로 포함시켰지 그 이전에는 바깥에 위치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신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같은 견해를 지지하면서 “정원무덤은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정원무덤 지지측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다는 슬픔의 길(비아돌로로사)은 현재 식료품점과 갖가지 상인들로 지저분하고 냄새도 지독할 뿐만 아니라 교회내부 6개 종파가 관리하며 서로의 영역을 고집하고 있어 가장 거룩한 곳으로 알고 온 마음을 깨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성묘교회 내부는 주요장소의 경우, 시리아정교회 콥틱교회 이디오피아교회 등 6개 종파가 분할해서 관할하며 각각 별도의 예배를 드린다. 특이한 것은, 십자군전쟁 이후 성묘교회 열쇠를 이슬람측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지 ‘골고다’에 대한 엇갈린 주장과 논쟁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들은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과 신앙은 전혀 무관한 것”이라며 양측 지지파들이 숨기고 있는 ‘은밀한 상업주의 생각’을 비난했다. 기독교는, 예루살렘 성내 2,000년전 세워진 서쪽 벽의 잔재인 ‘통곡의 벽’을 성지로 여기는 유대교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성지로 여기며 순례를 권장하는 이슬람과 달리 꼭 성지순례를 의무화하기 않기 때문에 위치논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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