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하기까지의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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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하기까지의 칼뱅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10.2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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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칼뱅과 프랑스의 종교개혁(1)
▲ 황의봉 목사.

칼뱅(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의 노용에서 신흥 중산층이었던 제라르 꼬뱅과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의 일곱 자녀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칼뱅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칼뱅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가운데 자라났으며, 열한 살 때는 노용 성당에 있는 라 게진느 채플의 사제 보조직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효자였던 칼뱅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를레앙 대학으로 전학하여 법학사 학위를 받고 그 후 법률 공부를 4년 더 해서 법률 면허증을 받았으나 법학 박사학위는 끝내 거절하고 받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갈고 닦은 그의 고도의 법학 지식은 후일에 그가 표현하는 교리의 정확한 언어 구사와 논리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를 개혁 1세대라고 한다면, 칼뱅은 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뱅이 겨우 읽기를 배우고 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고 있었고 칼뱅이 여덟 살 때, 루터는 95개 조문의 항의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칼뱅과 루터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칼뱅은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루터는 사교적이며 외향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칼뱅은 가끔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품이 치밀하고 과묵하며 꼼꼼하고 대찼던 반면, 루터는 자유분방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호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러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앙이 같다는 데에 뿌리박은 상호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539년 루터는 칼뱅의 작품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가에 대해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주는 공개서한’을 읽고 그 마음에 큰 기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또한 1545년 4월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한 책방에서 칼뱅이 저술한 ‘신앙의 교훈과 고백’을 사서 읽고 “이 저자야말로 학식과 경건을 겸전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만약 오콜람파디우스와 츠빙글리가 처음부터 이처럼 명료했다면 그처럼 좋지 못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논평하였습니다. 루터는 츠빙글리가 피상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칼뱅은 심오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칼뱅은 항상 루터를 변호하였는데,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늙은 루터를 비난하자, “부디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며, 얼마나 용기 있게, 강건하게, 유능하게, 학식 있게, 효과적으로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쳐부수느라고 계속 열성을 기울였는가를 보십시오.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대로 아래와 같은 입장에 추호도 변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나를 가리켜 악마라고 한다 해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 부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루터와 칼뱅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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