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링거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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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링거의 생애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9.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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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불링거와 스위스의 종교개혁(1)

오랜 세월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라는 이름은 스위스 개신교의 개혁주의 지류를 형성한 츠빙글리와 제네바 동료인 칼뱅의 그늘 아래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불링거는 개혁주의 교회의 한 아버지로 불렸고, 교회 정치적으로 당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많은 신학적인 저술들이 17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출판되었고, 또한 그에 의해 작성된 ‘스위스 제2신조’(헬베티아신앙고백)는 오늘까지 하나의 중요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으로 간주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습니다.

츠빙글리가 전 스위스에 영향을 준 개혁주의적인 ‘종교개혁의 효시’라고 하면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그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동시에 스위스와 유럽 전역에 그 종교개혁의 내용을 확대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언약 신학자’ 또는 ‘교회들의 목자’라 불리는 불링거는 스위스 취리히에 가까운 아르가우 캔턴에 있는 브렘가르텐의 작은 마을에서 다섯 번째 아들인 동시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불링거는 5세 때 벌써 브렘가르텐에 있는 초등 라틴어학교에 입학했고, 12세가 되자 부친은 그를 네덜란드 북부 에머리히에 있는 성 마르틴 라틴어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15세 때는 독일의 쾰른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의 기초를 이룬 철학사상을 공부하였습니다. 이 대학교는 과거 스콜라주의 학자들인 ‘대 알베르트’,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던스 스코터스 등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던 학교였습니다. 

불링거는 처음으로 신약성경 중 마태복음을 제롬의 주석과 함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로마 가톨릭 교리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결국 멜란히톤이 쓴 ‘신학총론’을 읽으면서 참된 복음의 진리가 무엇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18세에 불링거는 복음의 진리가 너무 좋고 기뻐서 주야로 성경과 교부들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비로소 크게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임을 깨닫고 성경에 기초한 진실한 믿음이 무엇임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6년 후 불링거는 쾰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브렘가르텐으로 돌아왔습니다. 카펠에 있는 시토 수도원장은 그에게 지역 수도원 학교장을 맡기겠다고 제의했지만 불링거는 자신은 수도사나 사제가 될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제나 수도사가 되지 않고 미사에 자유롭게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으로 그 수도원을 맡아 가르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 불링거는 츠빙글리를 접하게 됩니다.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관계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관계와 거의 유사합니다. 츠빙글리는 탁월하고, 추진력 있고, 성급하고 그리고 공격적인데 반해 불링거는 차분하고, 신중하고, 친절하고, 사려 깊은 인물입니다. 

1528년 취리히 종교회의에서는 그를 카펠 수도원이 아니라 카펠 목회자가 되라고 강권합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불링거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어서 교회 내에서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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