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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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의 힘
  • 승인 2004.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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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탄핵으로 온 나라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적 공허상태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에게 언제 대통령이 있었냐는 듯이 묵묵히, 혹은 체념한 듯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들을 보면, 가히 존경스럽고 한편 안쓰럽다. 대통령을 국부(國父)라 추앙하며, 대통령이 죽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전 국민이 울고불고 했던 때가 또렷히 기억나는데, 우리 국민은 누가 뭐라 해도 이만큼 성숙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주의, 주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성숙도와 함께 간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광화문에 모인 수많은 촛불들의 분노는 내 생각엔 국론 분열도, 편 가르기도, 대통령의 팬클럽 행사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볼찐대, 직접민주주의에서 간접민주주의, 곧 대의민주주의로 성숙했고,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을 인터넷이라는 시대의 이기가 바로 잡고 다시금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로의 새 변증법을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엔 가족과 함께 나도 하나의 촛불을 들었다. 어쩌면 위의 말은 나 자신에 대한 변명일지 모른다. 고백컨데, 나는 대통령을 그리 지지하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언론이 떠드는 386도 아니다. 허나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 그대로를 표현하고 싶었다. 이미 광화문은 예전처럼 화염병과 최루탄의 팽팽한 대립 속에 긴장감이 팽배한 자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전단지가 뿌려지는 자리도 아니었다. 다만 그 ‘느낌’들을 서로 공유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테네의 입법자 솔론이 법을 만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다. “법망(法網)이란 힘없는 작은 사람들은 걸려도, 힘있는 큰 사람은 모두 빠져 나가는 것이오.”

그 느낌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탄핵 그 자체가 법리적으로 어떻게 옳고 그른지 모르겠지만 탄핵제도가 있는 이상, 그것이 이뤄졌다 해서 그리 분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 탁월한 정치인인 대통령은 소시민들로부터 심정적 지지를 얻어냈다. 스스로가 권력을 포기함으로써, 권력있는 자들의 부패와 오만의 흉폭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포기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종, 그 끝도 없는 간격을 예수님은 몸소 겪으셨다. 전능한 힘을 써 보라는 유혹 앞에서 힘을 포기하고, 찾아온 어머니 앞에서 가족을 포기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모든 권력 앞에서 변론을 포기한 그 분이 보여주신 힘을 따로 이 지면에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절망과 허무로만 보이는 그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희망은 꺼진 듯이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힘이 나왔다. 생명을 살리는 힘, 구원의 힘이 그분의 포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포기하고 살까? 주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더 가지고, 더 얼마나 누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어깨에 힘을 주어야 할까?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무종교라고 이야기하는 대통령도 저만큼의 철학과 양식이 있는데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자기 변명과 탐욕의 아수라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노자에 보면 三十輻共一,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있다. 바퀴와 축 사이에 공간이 있으므로 수레가 굴러가는 것이다’라는 글이 있다.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텅빈 충만으로 아름답게 굴러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정호신부·샬롬의 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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