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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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최후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8.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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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츠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5)

마르부르크 회의 이후 루터파와의 공조체제가 무너져 힘이 약화된 가운데서도 츠빙글리는 모든 스위스 백성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던 산지의 주민들은 스위스에서 취리히가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1529년 4월 스위스의 숙적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드 공작과 동맹을 맺고 취리히에 대항하였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츠빙글리는 1529년 6월 저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카펠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글라루스의 집행관 한스 아이블리는 양편을 잘 중재하여 피 흘리는 전쟁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가톨릭에 속한 주들이 페르디난드와 맺은 조약을 취소하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맹을 철회했습니다. 이렇게 개혁운동에 대한 박해를 끝내며, 종교 선택을 자유롭게 허용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제1차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산지 주들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세워 밀, 소금, 포도주, 철 등의 거래를 금하는 경제 봉쇄령을 내렸습니다. 이 봉쇄령으로 어려움에 빠지게 된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한 주들은 1531년 10월 11일 8,000명을 이끌고 취리히에 대항하여 카펠로 몰려왔습니다. 

이때 취리히는 겨우 300명의 군인들이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1,5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군목으로 카펠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부상을 당하여(다리에 마비가 온 것으로 추정)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취리히의 개혁 운동은 심각한 위기를 맞은 듯이 보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측은 11월 20일 취리히와 제2차 카펠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따라서 취리히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활동이 허용되었고, 개혁운동에 대한 방해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취리히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츠빙글리가 개혁한 취리히 교회는 그의 사후 헨리 불링거가 지도해가다가 칼뱅과의 합의를 통해 제네바 교회와 연합해서 스위스의 개혁교회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르침 아래서 개혁에 동참하는 모든 도시들이 동일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헬베티아 신앙고백서’로 알려져 있습니다(고대 로마 시대에는 스위스를 ‘헬베티아’라고 불렀다). 이 헬베티아 신앙고백서에는 존 낙스, 그 외 다른 스코틀랜드의 목사들, 화란 남부의 교회들, 그리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개혁교회 회중들이 서명하였습니다.

츠빙글리의 죽음을 루터가 비평했지만 츠빙글리는 “나는 신학적 근거와 민주적 근거에서 칼을 들었고, 모든 교회는 복음에 상반되게 행동해서는 안 되며 상실된 복음의 회복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여기서 상기시키는 것은 교회의 전쟁윤리 곧 ‘정당전쟁론’입니다. 그것은 방위를 위한 전쟁을 정당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당방위 전쟁일지라도 성직자가 칼을 들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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