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하기까지의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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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하기까지의 츠빙글리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8.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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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츠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1)

독일에서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에 의한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신앙과 교리의 기초로 성경과 함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은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상당부분 로마 가톨릭의 의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중심적인 신학은 제네바의 개혁자 존 칼뱅에 의하여 계승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주의 신학’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는데 이후 이 명칭은 루터파와 구별하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1484년 1월 1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하우스에서 부유한 농부의 9남매 중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난 츠빙글리는 두뇌가 명철해서 학생 시절에 희랍어와 라틴어 성적이 우수하였고, 고전을 애독하면서 어거스틴의 저서를 많이 읽었으며,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서를 비롯한 저서를 애독하며 인문주의 학문을 깊이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에라스무스를 직접 만나 그와 학문적 교제를 나눈 후, 그는 더욱 철저한 인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부모는 영특했던 그를 아주 어릴 때부터 외지로 유학을 보냈는데 1506년에는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청소년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면서 특별한 죄책감 없이 살았으나 그 당시 신부나 수도사들의 세계도 부도덕해서 츠빙글리도 신부가 된 후 성직자로서의 순결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가 신부직을 얻기 위해서 은화 100개를 지불했다고 하니 교회도 그만큼 타락해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여 10여년 간 그곳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교인들을 돌보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는데 바쳤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과연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츠빙글리가 글라루스에서 목회하는 동안, 유럽에서는 스위스 젊은이들이 충성심과 전투정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져 로마 교황청의 용병으로 팔려가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이 때 츠빙글리도 관례에 따라 교구지역 용병의 군목으로 차출되어 1513년 6월 참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황청이 벌인 전쟁에 나가서 10,000여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죽고 시체가 되어 스위스로 돌아오면 그들의 젊은 과부들이 통곡하는 것을 본 츠빙글리는 용병 제도의 폐해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츠빙글리는 1515년부터 용병 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그는 민족주의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그는 용병제도로 돈을 벌고 있던 취리히 정부와 상인들의 미움을 사 결국 파직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교구와는 관계가 없는 아인지델른이라는 유명한 순례지의 민간목회자가 되어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독일에서 루터가 95개 조항의 항의서를 발표하고 면죄증 판매를 반대하기 한 해 전인 1516년이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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