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친구 멜란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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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친구 멜란히톤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7.1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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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10)

1497년 독일 남부 브레텐에서 태어난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의 이론을 완성한 이로 꼽힙니다. 루터가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깨우고 이를 설파하였다면,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정리하고 이를 집대성한 이는 멜란히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평생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로서 뜻을 함께 하였습니다.

1502년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루터는 멜란히톤의 그리스어 수업에 참석했고 멜란히톤은 루터에게서 신학을 배웠기에 그는 훗날 ‘나는 루터에게서 복음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신학적 질문에서 분쟁이 있었지만 종교 개혁을 위해서 멜란히톤은 열세 살 연상인 루터 편에 서서 종교개혁의 지도 인물이 되었습니다. 

1520년 10월, 루터는 이단으로 선포되었고 목숨의 위협을 느낀 루터는 군주 프리드리히의 도움을 받아 바르트부르크의 성에 숨어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번역 작업에 멜란히톤이 적극 참여했고 그의 그리스어 실력은 루터를 능가했기에 루터는 멜란히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히브리어 역시 멜란히톤이 더 능통했기에 훗날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할 때도 멜란히톤이 참여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 별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사실 루터 성경은 루터-멜란히톤 성경입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에 동기를 부여했고, 신학적 토대를 구축했으나 종교개혁 내내 개신교 교리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저술을 통해 사건을 만들고 논쟁을 일으키고 나아가 설교와 성경 해석은 책으로 펴냈지만 개신교 교리론은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1521년 멜란히톤이 처음으로 개신교 신학 교과서 <신학총론>을 펴냈습니다. 루터는 이미 1519년에 멜란히톤의 신학적 재능을 인정하면서, 그의 왜소한 몸집과 본업을 빗대어 “이 조그만 그리스인은 신학에서조차 나를 능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멜란히톤은 신학총론의 머리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면밀히 연구할 것이 아니라 경배해야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죄인을 의롭다 한다는 새로운 의인 이해는 종교개혁 신학의 정수이며, 신학총론의 핵심입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의회에서 낭독된 신앙고백서는 멜란히톤이 작성했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신앙이 구교도도 인정하는 신앙의 기반 위에 서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당시 제국 의회에서는 반박되어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다른 신앙고백에도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들어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도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입장들을 표명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멜란히톤에 대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가장 소중한 도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보다 멜란히톤과의 관계가 끊어질까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루터와 같이 영웅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 개혁이 체계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멜란히톤과 같은 동역자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함께 협력하여 개혁하고, 말씀 안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종교개혁의 중심도시, 독일의 비텐베르크시 청사 앞에는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란히톤 두 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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