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스 의회 이후의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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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의회 이후의 루터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6.2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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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8)

루터가 출교 되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 국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하였습니다. 독일 정부는 루터에게 신변 보장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프레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의회에 나가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만약 보름스의 지붕의 기왓장들만큼이나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해도, 나는 그 곳에 가겠다”고 말하면서 보름스로 향하였습니다.

의회는 루터에게 지금까지 그가 주장해 온 사상들을 철회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루터는 24시간의 여유를 요청하고 무엇을 철회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하며 곰곰이 따져보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의회 앞에서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정죄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스르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외친 후, 그 자리에 꿇어앉았습니다. 그러자 카를 5세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국외로 추방할 것과 그들이 쓴 글에 대한 소각령을 내렸습니다.

루터가 보름스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은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대하여 찬양하였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당국은 루터를 살해하기 위한 교활한 음모를 세웠습니다. 이를 알게 된 프레드리히는 그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오 10세의 위협으로부터는 피신할 수 있었지만 루터 개인적으로는 무척 힘든 시기였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웠고, 사탄은 좌절감을 넣어주어 심신이 모두 괴로웠습니다.

그는 소명을 받았으나 사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울증도 걸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설교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저술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루터는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10개월 동안 이 성에서 프레드리히 현인의 보호 가운데 많은 글을 썼는데, 특별히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는 1522년 3월 조용히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본격적인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강단에는 독일어 성경이 놓여지고, 사제들도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미사가 아니라 독일 찬송가로 예배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식 중심의 미사 대신 설교하는 기회를 많이 늘렸습니다. 

루터는 1546년 그가 태어났던 아이스레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만년에 건강이 나빠 고통을 당하였으나 운명할 때에는 별로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계속해서 세 번이나 일어나 “아버지여, 주님의 손에 나의 영혼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해 주셨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회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곳은 29년 전에 그 교회의 문에 루터가 유명한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였던 곳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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