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 발견을 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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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 발견을 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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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0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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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1)

루터(1483~1546)의 부모는 본래 농부 출신이었으나 루터가 출생한 이듬해에 구리 광산 중심지인 맨스펠트로 이주하여 주물 공장을 경영하면서 가업이 날로 번창하여 1491년에는 이 도시에서 시민의 권리를 변호할 수 있는 4명의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런데 1505년 7월 2일 루터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친구와 함께 맨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오던 도중 폭풍과 천둥이 치고 친구가 벼락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루터는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하고 서원하였고, 무사히 돌아온 그는 즉시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철야 기도는 물론, 금식과 기도와 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507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후에도 금욕과 고해성사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1510년 루터는 수도원의 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성자들의 유해를 숭배함으로 큰 은덕을 입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루터는 당시 성지로 알려진 로마 순례가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거룩한 계단’(스칼라 산타)이라고 불리는 라테란 성당의 28개 대리석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순례의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거룩한 계단’이란 예수께서 걸어서 빌라도의 총독관에 이르렀다는 계단인데 326년 콘스탄티누스의 모친 헬레나가 가지고 왔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의 관례를 따라 계단을 기어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한 번씩 외웠고, 계단에 입을 맞추었지만 루터는 그곳에서 사죄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수도원장의 권유를 따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어 성경을 연구하여 강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회의를 품었습니다. 특히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갈망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라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 … 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신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크게 열려진 문을 통하여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 듯 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탑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탑의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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