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스위스 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인물이다. 박해를 피해 휴식을 취하려던 칼뱅을 만나 제네바에서 개혁을 시작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다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파렐은 뇌샤텔에 정착해 27년 간 사역했다. 그와 동시에 스트라스부르, 메츠, 로렌 등을 오가며 순회설교자로 살았다. 불같은 다혈질 성격으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덕분에 ‘붉은 머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명예도 부귀도 나를 교황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묶어 두었다. 세상의 어떤 통찰력과 학식들도 내 마음 속에 있는 교황주의의 미신을 제거하지 못했다. 오직 성경만이 나로 하여금 교황주의의 미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만들었다.”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진리
기욤 파렐은 1489년 프랑스 동남부 도피네 지방에서 가난한 귀족 가문의 일곱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가족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아 몸에 뱄으며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살면서 자신이 믿는 교리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학문에 욕심이 많았던 그는 파리에서 고전어, 철학을 배웠고 신학도 공부했지만 정식 사제 안수를 받지는 않았다. 그는 공부를 하던 중 프랑스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을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성경번역가이기도 했던 르페브르는 파렐에게 바울의 서신서들과 이신칭의 교리를 소개했다.
파렐은 스승의 추천으로 신약성경을 깊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인생을 뿌리째 뒤바꿀 진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믿어왔던 교황의 권위, 성직위계제도, 면죄부, 연옥, 미사, 7성사, 성직자의 독신주의, 마리아와 성인숭배에 대한 어떤 근거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진리에 붙들리자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파렐은 성경을 연구하며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신앙의 규범이며 로마교회의 전통과 의식들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동안 자신을 옥죄던 가톨릭의 규범에서 벗어난 파렐은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쁜 구원의 진리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의심 속에 방황하거나 이성을 잃고 만다. 교황주의의 미신 속에 영혼의 눈이 멀어있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끔찍한 일”이라고 고백했다.
열렬한 교황의 예찬자이자 신봉자였던 파렐의 시선은 180도 방향을 틀어 가톨릭의 부패와 어두운 면으로 향했다. 그는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며 미사는 우상숭배이고 성화와 성물들은 가나안의 우상들과 마찬가지라고 역설했다.
1521년 파렐을 개혁신앙의 길로 이끈 스승 르페브르가 이단 혐의를 받고 은퇴해 모우(Meaux) 지방으로 가자 파렐도 함께 했다. 모우의 기욤 브리소네 주교는 처음엔 이들에게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하도록 인가했지만 1523년에 이르러서는 설교를 금지하고 추방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파렐의 ‘순회 설교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됐다.
그는 추방 후 고향으로 가서 자신의 네 형제와 몇 사람을 개종시켰지만 이 일이 빌미가 돼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됐다. 고향을 떠난 파렐은 바젤로 향했고 이후 취리히와 샤프하우젠, 콘스탄츠를 거쳐 스트라스부르, 베른을 떠돌면서 개혁신앙을 설파했다.
스위스 개혁교회의 개척자
스위스 전역을 떠돌던 파렐이 제네바에 도착한 것은 1532년이다. 제네바에서도 파렐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파렐로 인해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도시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베른에서 발행한 신임장을 보여주며 자신은 문제 인물이 아니라 진리의 설교자라고 항변했다.
파렐은 베른의 보호 아래 제네바의 위그노 가정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1534년에는 쿠텔리에라는 수도사가 종교개혁을 공격하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강단에 나섰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그가 했던 첫 번째 공개설교였다.
파렐의 설교는 도시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한 달 뒤 주교는 도시 전체에 경계령을 내렸고 사보이의 공작은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해왔다. 하지만 베른은 제네바의 개혁을 지지했다. 베른의 강력한 보호 아래 파렐과 그의 동료 비레, 프로망 등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1535년 8월 27일 제네바 대의회는 종교개혁 칙령을 발표했으며 미사가 폐지되고 성상과 성물들이 교회에서 제거됐다. 드 리베 수도원에는 종교교육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으며 대학과 신학교도 설립됐다. 성 피에르교회와 성 제베르교회에서는 매일 설교가 울려 퍼졌고 주일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파렐은 스위스 개혁교회의 개척자라 불리게 됐다.
칼뱅을 제네바로 이끌다
파렐의 개혁이 한창이던 1536년 8월 칼뱅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던 길이었다. 깊은 밤 파렐은 칼뱅이 머물던 여관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는 정중하게 칼뱅에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칼뱅은 조용히 은거하면서 공부하고 싶다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몇 번의 요청에도 칼뱅이 계속해서 거절하자 파렐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파렐은 칼뱅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그대의 휴식과 공부를 저주하기 바라오”라고 소리쳤다.
파렐의 단호한 선언은 칼뱅의 마음을 움직였다. 칼뱅은 훗날 이 때의 일을 두고 “그때 나는 파렐의 무서운 엄명에 두려워 견디지 못해 몸이 떨렸다. 그의 음성이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후 파렐과 칼뱅은 동역자로서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파렐은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칼뱅을 언제나 존중하고 배려했다. 자신의 저작인 ‘신학총론’의 서문에서 오히려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추천할 정도였다. 칼뱅 역시 파렐과 주고받았던 서신에서 그를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로 표기하며 애정과 존경을 드러냈다.
눈 감기까지 열정 불태운 설교가
이후 제네바에서 물러난 파렐은 뇌샤텔에서 27년 동안 목사로 사역하게 된다. 동시에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 메츠, 로렌 등 스위스 전역을 돌며 순회설교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1549년에는 칼뱅과 함께 취리히에서 하인리히 불링거를 포함한 쯔빙글리주의자들과 만나 ‘취리히 일치신조’를 작성했다.
1553년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던 세르베투스가 사형 선고를 받자 그를 찾아가 회개를 권고했으며 1557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독일을 방문해 왈도파와 위그노들의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다.
젊은 날을 모두 독신으로 지냈던 파렐은 1558년 69세가 되던 해 뇌샤텔로 도망 온 가난한 처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파렐은 이후에도 기력이 다할 때까지 여러 도시를 다니며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그는 1565년 5월 메츠의 개신교도들을 찾아 설교한 것을 마지막 여행으로 그해 9월 눈을 감았다. 1876년에는 뇌샤텔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