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
상태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
  • 승인 2004.02.2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는 얼마 전 뉴질랜드 한인교회 사경회와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다녀오게 되었다. 뉴질랜드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가진 나라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살기 좋은 환경을 지닌 뉴질랜드를 이민 희망지로 꼽는 사람들이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5년 전에 뉴질랜드 제일의 도시인 오클랜드에서 사경회를 인도할 때만해도 그곳의 한인교회는 겨우 다섯 개 정도 였는데, 이번에 가보니 무려 100여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곳에 이민을 많이 간 것이다.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가족 중 일부가 다른 가족과 떨어져 와 있는 경우가 많다.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좀처럼 벗어날 줄 모르는 우리나라에 비해 교육여건도 앞서고, 무엇보다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매력에 많은 엄마들이 남편과 헤어져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와 있다는 것이다. 자녀의 교육을 위한 부모들의 희생과 교육열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런 댓가를 치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씁쓸함이 먼저 배어나온다. 오늘날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영어를 비롯한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남다른 경쟁력을 확보해주기 위한 부모들의 희생은 오히려 미덕으로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꼭 자녀들을 해외 유학 보낸 부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부모가 추구하는 바는 자녀들이 세상에 나가 남들보다 앞설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갖춰진 경쟁력으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소위 말하는 일류 기업이나 잘나가는 직업을 얻고 나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열의 여덟, 아홉은 사회적인 신분 상승이거나 부와 명예와 권력의 확대 재생산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부모들의 교육열은 자기 자녀들을 이기주의로 가득한 사악한 지식인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여 추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이러한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가치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강도만난 자의 비유는 이 문제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던져주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만난 자야말로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소위 엘리트요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들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반면 당시에 멸시 천대의 대명사였던 사마리아 사람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강도만난 자를 극진히 돌봐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원하는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는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가?

이처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좀더 순수해지고 진실해지고, 사랑으로 남들을 돌보는 일일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이라도 “순수하고 진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간상”으로 달라져야 한다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심성을 회복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길이야말로 유일한 문제해결의 열쇠임을 오늘도 증언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