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예수’ 품은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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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예수’ 품은 순교자들
  • 김성해 기자
  • 승인 2017.06.21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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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 속 순교자 배출한 한국교회

6.25전쟁 67주년, 순교자들 정신 기리는 한국교회

죽는 순간까지 찬양하며 기도했던 믿음 본받아야

공산군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 뜨거운 고백

67년 전, 대한민국 땅 위에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과 칼을 겨누는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3년 넘게 지속된 전쟁은 남한과 북한 양쪽에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는 참극을 낳았다. 

전쟁으로 희생된 무고한 수백만 명의 목숨 가운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에 순교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벌인 횡포는 적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줬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부인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순교자들은 스스로를 향해 예수님을 믿는 자임을 시인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창과 칼을 빼들고 발로 차는 인민군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피가 물든 땅에는 지금의 한국교회가 세워져 있다. 각 교회들은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며 계승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67주년이 되는 해.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지켜낸 순교자의 신앙을 소개한다. 

▲ 6.25 동란속에서도 복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성도들은 예수를 품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사진제공:병촌성결교회)

베드로의 순교 이어 받은 오병길 전도사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찾은 고창 덕암교회의 故 오병길 전도사는 1897년 3월, 덕암교회 창설자 중 한명인 오윤팔 씨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 전도사는 어린 시절, 베드로의 순교 말씀을 통해 ‘나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품고 살아왔다. 

공산군은 오 전도사를 본가로 내쫓고 교회를 빼앗았지만, 그는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 전도사는 자신의 형인 오주환 집사의 집에 지하 예배실을 만들고, 그 곳에서 매주 주일마다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당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을 찾은 오 전도사는 그 은혜에 감격해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고백과 함께 찬송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지하예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산군은 기독교인 수색과 함께 지하 예배실을 발견했고, 그 곳에서 예배드리는 오 전도사와 그의 가족들을 찾아냈다. 공산군은 오 전도사와 그의 가족들을 구타한 뒤 처형하기 위해 그들을 끌고 갔다. 

故 오병길 전도사가 순교한 일화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1950년 9월 공산군이 주도한 인민재판의 날, 옆구리와 가슴, 아랫배 등 온 몸을 창에 찔려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순교했다는 이야기와, 끌려가는 도중에도 찬송을 부르다가 공산군이 던지는 돌과 죽창에 맞아 숨을 거뒀고, 두 아들만 인민재판의 날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로 나뉘어 전해진다. 중요한 점은 그가 처형당한 방식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찾은 그의 신앙이다. 

고창 덕암교회는 오 전도사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20여 명 교인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이름의 순교비를 세우고,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 순교자들을 배출한 교회들은 기념비를 세우는 등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사진제공:목포연동교회)

죽는 순간까지 기도드린 김개수 장로
예수를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공산군들에게 연행된 목포연동교회의 故 김개수 장로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담대했다. 심지어 김 장로는 붙잡히기 전 자신의 교회 담임인 최명길 목사와 나눈 마지막 인사가 “잘 죽읍시다”였다고 전해진다. 

김개수 장로는 1900년 4월 6일, 전남 장흥군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 장로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어린 시절부터 막노동 등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지만, 가정형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조실부모의 처지에 놓이기까지 했다.

결국 김 장로는 목포로 거처를 옮긴 뒤 그 곳에서 생선을 판매했다. 조금씩 그는 생활의 안정을 찾았고, 아내 안장례 씨도 만나 가정을 꾸렸다. 
김 장로는 자신의 생업인 생선 덕분에 복음을 접하게 됐다. 당시 김 장로에게 생선을 인수받던 한 상인은 “베드로도 당신과 나처럼 생선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뒤 그의 제자가 되었다”며 말씀을 전했다. 

상인의 말을 들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장로는 성경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마태복음 4장 18~20절의 말씀을 본 뒤, 상인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이후 그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1929년 신사참배에 항거한 박연세 목사의 교회인 ‘양동교회’로 신앙의 첫 발걸음을 떼었다. 그 다음해인 1930년 7월, 양동교회는 연동교회를 설립했으며, 김개수 장로는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해방 이전에도 그는 정부수립을 위해 많은 역할을 담당했지만, 해방된 후에도 대한청년단 단장을 맡으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 또한 김 장로는 반공주의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빠진 많은 청년들을 예수님께로 전도했다.

당연히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김 장로의 태도를 곱게 여기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김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협박을 수차례 받았다. 또한 6.25전쟁이 일어난 후 공산군들은 김개수 장로를 찾으려고 그의 집을 방문해 만삭인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괴롭혔으며, 식량을 약탈해가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개수 장로는 공산군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김 장로는 자신의 신앙을 조롱하며 고문하는 공산군들에게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1950년 9월 27일 밤, 공산군들은 김개수 장로와 형무소에 감금시킨 사람들을 목포시 근교에 있는 대박산 총살 현장으로 끌고 갔다. 총성이 울려 퍼지는 대박산에서도 김개수 장로는 감사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 숨을 거뒀다.

목포연동교회의 순교자는 김개수 장로 외에도 최명길 목사와 김창옥 장로가 있다. 교회는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순교기념 갈릴리신학강좌를 개최하고, 지역사회학교를 설립하며, 교회 내 순교자기념비를 세우는 등 그들의 순교 정신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다. 

총칼 앞에서도 복음 전한 정수일 집사
“주여, 내 영혼 받으소서.”
흡사 스데반 집사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은 병촌성결교회 성도인 故 정수일 집사(당시 31세)가 죽기 직전 외친 말이다.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던 정 집사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는 신앙인이었다. 

1950년 9월,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해진 공산군들은 이 달 27일과 28일 양일간에 걸쳐 충청도 논산에 위치한 병촌성결교회 성도 74명을 한꺼번에 붙잡아 고문과 구타를 반복하며 ‘예수를 믿으면 죽이겠다’며 그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눈앞에서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정수일 집사는 시댁 가족들,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과 함께 찬송하고 기도했다. 심지어 정 집사는 “공산군은 패전한다. 이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공산군들은 몽둥이와 삽, 괭이, 죽창 등을 들고 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구덩이에 그대로 묻었다. 정 집사는 죽기 직전에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외쳤다. 후일 집단 매장된 곳에서 발견된 정 집사의 시신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는 만삭의 몸으로 품 안에 자신의 막내아들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병촌성결교회 성도 74명 중 66명은 정 집사와 함께 순교의 길을 걸었다.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왔지만, 정수일 집사와 성도들은 공산군의 고문과 위협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폭행을 당하고 땅에 묻히면서 숨을 거뒀다.  

공산군의 학살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린아이 3명, 그리고 장년 신자 5명뿐이었다. 생존자들은 ‘살아 있는 순교자로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순교 현장에 다시 병촌성결교회를 재건했으며, 순교 사건을 증언하며 살았다. 

병촌성결교회는 66명 순교자들의 정신을 후대에게 전하기 위해 ‘66인 순교 기념탑’과 ‘66순교기념관’을 건립했으며, 현재 새로운 전시관을 준비 중이다. 병촌성결교회 김형선 목사는 “66명 순교자들의 고귀한 신앙과 정신이 헛되지 않도록 순교신앙을 계승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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