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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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교육
  • 강석찬 목사
  • 승인 2016.07.1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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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 목사·예따람 공동체

2015년 11월 26일 ‘달다’의 ‘일상 웹툰’에 ‘누구나 꽃을 품고 산다.’라는 감동적인 글이 삽화와 함께 실렸다. 2003년 10월, 신당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지하철 아래 사람이 깔렸다!” 역사에 시민들이 달려왔고, “같이 지하철 밀어보자. 하나 둘, 하나 둘.”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하이힐 벗어던진 아가씨까지 지하철을 밀기 시작했고, 비명소리는 일사불란한 구호로 바뀌고, 기적이 일어났다. ‘웹툰’은, 파리의 테러를 본 세계인들이 SNS의 자신의 프로필에 자기 얼굴이 아니라, 프랑스 국기를 내건 것을 인용했다. 이어진 웹툰의 삽화는 한 사람이 장대비가 내리는데, 웅크리고 고개 숙여 얼굴을 감싸 안고 비를 맞고 있는 장면이다. 그 사람 주변에 우산을 든 사람들이 서 있다. 다음 삽화는, 사람들이 웅크린 사람을 돌보는데, 한 여인이 그를 따뜻하게 품고,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받쳐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우산이 커다란 꽃잎을 가진 ‘꽃’이었다. ‘달다’ 씨는 “누군가의 아픔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앞 다투어 따뜻한 마음을 꺼낸다. 그들이 품고 살던 꽃이 피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울음이 난다.”라 썼다.

‘누구나 품고 있던 꽃’은 무엇일까? 시론자는 ‘희망’이라 생각한다.

몰트만(Moltmann)교수가 1964년에 발표한 ‘희망의 신학’이 1967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때,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지는 “하나님의 죽음신학이 희망의 신학 때문에 기반을 잃어 버렸다”라고 논평했다. 독일의 슈피겔(Der Speigel) 잡지는 “그리스도인의 창백한 피에 철분을 공급했다”고 평했다. 세계 1차, 2차 대전 이후, ‘신의 죽음의 신학’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덮고 있었다. 과연 이 시대의 현실은 인간의 희망을 깨우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역사라 할 수 있는가? 신은 죽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몰트만 교수는 “왜 그리스도교 신학이 자신의 주제가 되어야 한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하면서, 약속의 책, 희망의 책으로부터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희망의 근거로 삼는 ‘희망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시론자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성경에서부터 꽃송이 한 송이를 피워 냈는데, 그 꽃이 희망꽃이다’라고 이해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는가? 한국교회는 이 어둠의 시대에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교회와 교회 직분자들의 범죄행위에 관한 사건들과, 세상 밖에서 교회를 향하여 던지는 비판의 소리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교회는 시대의 등불 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어디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2017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제2의 종교개혁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2016년 7월호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독일선교사 이말테 교수는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드리는 글’에서, 오늘의 한국개신교회가 500년 전 종교개혁을 있게 한 16세기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공통점이 너무 많다고 평하면서,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오늘의 한국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다. 교회들마다 여름행사로 바쁘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은 교회의 미래이다. 여름성경학교, 수련회로 신나게 놀고 왔다는 계획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희망교육’ 여름행사가 계획된다면, 절망적인 한국교회에 희망꽃 씨앗이 자라는 것이 아닐까?

시론자의 책상머리 라디오에서 바흐(Bach)가 1716년 바이마르에서 성령강림절 4째 주일 예배를 위하여 작곡한, 칸타타 147번 ‘예수는 인류의 소망, 기쁨되시니’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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