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보다 귀한 영혼, 재독한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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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다 귀한 영혼, 재독한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합니다”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6.07.04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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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들의 어머니, 박옥희 선교사

한국전쟁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던 1960년대.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가야만 했던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있다. 꿈 많은 20대 고향을 떠나 막중한 노동을 견디며, 언어적 장벽과 외로움, 지독한 향수병에도 인내해야만 했던 재독 한인들.

박옥희 선교사(77)는 간호사이자 독일 최초 한인 목사로 재독 한인들의 눈물을 닦으며 한평생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지난 50여년 간의 사역을 담은 회고록,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찾아’ 책을 출간하고 최근 방한했다.

▲ 박옥희 선교사(77)는 간호사이자 독일 최초 한인 목사로 재독 한인들의 눈물을 닦으며 한평생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지난 50여년 간의 사역을 담은 회고록,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찾아’ 책을 출간하고 최근 방한했다.

책의 추천 글을 쓴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김명혁 목사는 “박옥희 선교사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독일로 유학 가서 간호 선교사로, 파독 간호사들의 언니와 어머니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신앙의 스승으로 살았다”고 전했다.

지난 2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김명혁 목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 선교사는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구김살 없이 온화한 모습이었다. 17세에 걸린 결핵성 늑막염으로 인한 후유증에 아직도 몸이 불편하지만, 선교를 향한 열정은 여느 청년보다 뜨거웠다.

“17세에 결핵성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위와 심장까지 결핵균이 퍼져, 가족마저 손을 놔버린 상태였는데 크리스천 의료진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을 겪으며 한 손으로는 사람의 상한 곳을 치유하고, 다른 손엔 성경을 들고 복음을 전하는 나이팅게일과 같은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그 이후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다. 광주 숭의실업고 졸업을 앞두고 추천을 받아 1964년 독일 아그네스카를 간호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그러나 ‘종교개혁의 나라’라는 기대감을 안고 도착한 그는 독일의 영적 상황을 실제로 보고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된다. “주일에도 간호사로 근무해야 했고, 채플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생명을 걸고 주일 성수하려는 저를 보고 오히려 ‘바리새인’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핍박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니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환자들이 계속 나를 찾기 시작하고 ‘사막의 구름’, ‘천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며, “단순한 근무가 아닌 복음 전파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전했다.

이후 선교사로 소명을 놓지 않았던 박 선교사는 1968년 리벤첼선교회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이 다가오자 당시 학장이었던 플라움 목사가 그에게 재독 한국인을 위한 선교사로 사역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처음 독일의 영적 상황을 보고 매우 실망했던 그는 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박 선교사는 “격식에 매여 죽은듯한 신앙과 말씀도 영성도 없는 주일예배 등 독일교회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재독 한인들, 특히 한국의 간호사들이 나와 같은 영적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이란 염려가 마음에 솟구쳐 올랐다. 또 세속화된 교회 이면에 경건주의 신앙전통을 유지하는 복음 중심적인 교회가 있다는 것을 보게 하셨다”며, 재독 한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결단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는 1972년, 독일복음주의협의회 주최로 목사안수를 받고, 재독한인선교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돌입했다. 신학교 시절에는 틈만 나면 그의 셋집에 한국 간호사들과 함께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가졌다. 또 이들을 리벤첼신학교의 각종 수련회와 선교축제에 초청해 신앙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도왔다.

박 선교사는 “처음 10년 동안은 독일 전역과 스위스를 걸친 순회전도여행, 주말 수련회와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한국 간호사를 위해 사역했다. 다음에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파송 선교사 선교사님들과 협력해 한국 간호사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는 70년대 후반부터는 슈투트가르트와 부퍼탈에서 한인선교교회를 설립, 독일 전역의 한인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사역을 진행했다. 80년대부터 ‘가정’사역으로 초점을 옮겨 국제결혼으로 문화적 어려움을 겪는 한독가정을 대상으로 수련회를 진행하며,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재독 한인 선교사역을 통한 그의 공로는 독일정부를 통해서도 인정받게 된다. 2000년에는 독일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십자공로훈장 사회 및 복지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2009년에는 바이에른 주 사회공로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선교의 여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캄보디아로 선교를 다녀왔으며,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큰 오빠가 6.25전쟁 이후 행방불명 된 후 이산가족의 아픔이 있어요. 더욱이 북한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주께서 은혜를 주시면 북한에 가서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기도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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